<지난 4월 29일 이화여대 대학원 학생회가 주최한 제14회 이원학술제 ‘우리 시대의 행복한 가족(?) 이야기-건강가정기본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 담론의 흐름에 비추어’에서 조주은씨(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현대가족이야기>의 저자)가 발표한 '법과 제도가 바라보는 가족'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단지 ‘폐지’만 목적으로 해선 안돼 호주제도의 가부장성은 ‘호주승계의 남성우선’, ‘부성강제조항’, ‘결혼 후 처의 부가입적’ 조항으로 대표된다. 호주제도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여성은 불완전한 사회적 성원권을 갖는다. 둘째, 여성은 가(家)를 이어가는 어머니로서 존재해야 하지만, 자녀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다. 셋째, 남성이 있는 가족만이 정상가족이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있는 호주제도는 다른 제도와는 달리 ‘폐지’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호주제는 10여 년간 여성계의 꾸준한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2003년엔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률개정안이 의원 입법과 정부 입법으로 각각 제출되고, 호주제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대중매체로 확대되어 커다란 쟁점사안으로 부각됐다. 여성부는 법무부와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률 개정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법무부가 제출한 ‘민법중법률개정안’은 국무회의에서 부분 수정돼 정부입법으로 국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2004년 2월까지 정부가 제안한 법률안 모두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계류되었고 16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호주제도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폐지만을 목표로 한다면, 호주제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불평등한 요소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호주제 폐지운동 과정에서 어떠한 집단들의 이해관계의 경합 속에 무엇이 문제화되고, 어떤 이슈가 비가시화 되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주제도를 폐지하자는 입장과 존치하자는 입장은 호주제도를 어떻게 문제화하였는지,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이슈가 은폐됐는지 살펴보자. 새아버지의 성 vs 친아버지의 성 호주제도는 한국사회의 공/사 영역에서 여성을 사적인(가족적인) 존재로 강하게 규정하면서 이등시민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전략에서 호주제로 인한 ‘피해사례’를 강조해 왔다. 호주제를 폐지하자는 측이 강조했던 담론의 내용은 재혼가족의 ‘자녀들’이 ‘새아버지’의 성씨와 달라서 겪는 정신적인 피해들이었다. 그 근거는 호주제도의 ‘자녀의 부가입적 및 성(姓)과 본(本)’에서 기인한다. 이혼한 엄마랑 같이 사는 자녀는 주민등록에는 ‘동거인’으로 표기가 되고, 같은 호적에 있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호주제는 이혼한 가족에게만 문제라고 인식되었고, 더 나아가 재혼가족의 자녀문제로 환원됐다. 이처럼 호주제 폐지 측의 양성평등이라는 가치는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 때문에 자녀를 중심에 둔 ‘모성’이데올로기와 결합하게 된다. 여성들의 권리는 여성들의 복리에 제한당하고 자녀들의 복리는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해달라는 호소, 즉 새아버지 가부장제로 이어져왔다. 가족의 질서: 핵가족 vs 직계가족 호주제도는 결혼과 부계계승을 축으로 하는 가족관계만을 ‘정상적인’ 가족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가족을 비정상 가족으로 분류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호주제 폐지 측와 존치 입장은 호주제도를 ‘가족의 질서’와 관련하여 논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측 에서는 호주제도를 가족의 질서와 관련한 현실 불합치성을 지적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3대를 규정하고 있는 호주제도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부부중심의 핵가족적 질서와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2대를 중심으로 한 핵가족 중심성은 가계계승 논리와 함께할 수 없는, 패륜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수호하려고 하는 ‘정통가족제도’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성(姓), 본(本) 문화를 보호하고 문중과 족보문화를 계승하여 수직적인 가족질서와 체계를 이어나가자는 것이다. 이성애 기반 정상가족중심성 여전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호주제의 문제점으로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호주제가 여아낙태를 성행하게 하고, 성비불균형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아낙태의 문제는 성비불균형의 문제로 드러나고, 성비불균형의 문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여아와 짝을 이룰 수 없는 남자아이들의 외로움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호주제폐지, 평등가족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유인물에는 어느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이 들어있다. 그 자료사진에는 성비불균형으로 인하여 여자아이와 짝을 하지 못한 나머지 남자아이들이 혼자서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여아낙태를 성비불균형의 문제로 드러내는 것은 여성문제에서 여성을 주체로 보지 않는 시각을 보여주는 한 예다. 성비불균형의 문제는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짝을 이뤄야 ‘정상’이라는 이성애중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호주제의 문제에서 비껴간다고 생각하는 아들의 어머니들에게 이후 남성들의 배우자 선택의 곤란함이라는 위기의식과 만나게 한다. 새 민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법무부의 홈페이지(www.moj.go.kr)에 접속하면 바로 ‘법과 질서의 확립’이라는 제목 하에 4인으로 구성된 핵가족의 피크닉사진이 배경화면으로 뜬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부부, 남아와 여아로 구성된 가족은 이성애에 기반한 핵가족이 ‘법과 질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부가 호주제 폐지와 관련하여 만든 옥외 전광판 광고의 내용도 비슷한 논조다. ‘가족을 지키는 것은 호주제가 아니라,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와 함께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딸로 구성된, 전형적인 정상가족(The Family)이다. 호주제 폐지가 정책으로 채택되기 전까지 호주제 폐지론자들의 주장 중 하나는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해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호주제 존치론자들은 지금도 이렇게 이혼율이 심각한데 ‘호주제마저’ 폐지되면 가족해체가 급속해져 사회가 붕괴될 것이라고까지 진단했다. 결국 호주제 폐지론자들과 존치론자들은 모두 정상가족 해체를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책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정상가족중심성은 법무부에서 국회에 제출한 민법(친족)개정안에 가족의 범위를 ‘부부, 그와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부부와 생계를 같이 하는 그 형제자매’라고 지정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호주제 폐지가 정책으로 형성되기 전과 형성되는 중에도 이성애에 기반한 핵가족중심성은 약화되지 않아서 다양한 가족을 주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차별받는 가족들 대변해야 이 글은 호주제 존치와 폐지를 둘러싼 담론의 경합과정이 어떻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게 되었는지 살펴본 것이다. 호주제도는 16대 국회에서 폐지되지 못했다. 우리는 호주제도 폐지운동을 새롭게 준비해야 할 시점에 있다. 호주제도는 더 이상 특정한 가족 안의 자녀문제로 환원되어서는 곤란하다. 호주제도는 다양한 가족구성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고 국민 대다수를 점하는 다양한 가족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호주제도 폐지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주요하게 다뤄져야 할 이슈는 ‘여성의 시민권’, ‘가족구성에 관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호주제도 폐지에 대한 대안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부나 신분등록표에 배우자, 부모와 자녀, 구호적과 구호주까지 기록되는 방식의 제도가 호주제 폐지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되어선 안 될 것이다. 국가는 개인이 아버지나 남편을 통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하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다양한 가족이 배제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별 신분등록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법률에 의해서만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핵가족을 정상가족으로 범주화하는 다양한 법, 제도들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무의식까지 점검해보며 새로운 세상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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