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윤고은님은 경기도 상우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편집자 주>
봄이의 눈물 2004년 3월. 처음 교사가 되자마자 바로 담임을 맡았다. 교사의 상에 대한 고민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서른 명이 넘는 학생들이 나의 ‘관리’ 하에 놓였다. 막막함. 며칠 후 한 학생이 무단결석을 했다. 불러서 얘기를 했지만, 또 결석을 했다. 그리고는 가출을 했다. 아주 아주 막막함. 겨우 학교에 오게 해서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도대체 왜 그럴까. 피할 수 없으니 즐겨왔던, 그러한 상황에서 혜택을 맛봤던 나로선 그 속사정이 정말 궁금했다. 학교에 오기 싫은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학교에서 해 주지 못한다는 것.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달리 꿈이 명확한 그 학생에게는 도무지 필요가 없는 과목들이 너무나 많았다. 졸업장을 따기 위해, 사회에 나가서 부적응자로 낙인 찍히지 않기 위해 참아야만 하는 3년이 그 학생에게는 상당 부분 시간낭비였다. “이 학교에 있으면 안 되겠네.” 나의 말 한 마디에 봄이(가명)는 눈물을 보였다. 교사가 학교를 부정하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었을까. ‘수박 겉 핥기’. 그러나 겉이라도 핥아야, 구석구석 골고루 핥아야, 수박이 맛이 있을지 없을지는 절대 의심하지 말고, 어쨌거나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니 무조건 핥아야 나중에 편하다는 말을 수백 번 들어왔고, 이를 위해(?) 다수결의 원리까지 주입 받은 상태였으니 중고교 시절의 내 선택은 자명했었다. 공부, 까짓 거 하고 보자. 미친 듯이 해 주고 나서 나중에 두고 보자! 하지만 이러한 선택도 극히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음을 그 알량한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모든 것은 환상이었으니, 난 완전히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나의 눈물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이 책을 실용음악을 전공해 작곡 일을 하고 싶다는 봄이와의 상담 후 다시 읽었다. 참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 때마다 계속 눈물이 흘렀다.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거였어.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다. 문제가 많은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학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정도였을 뿐. 하지만 직접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한 후에 읽으니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야만 하는 비합리성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예체능 계열이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것은 물론 그 학생의 사정이다. 이러한 개별성까지 학교에서 인정해 주기란 힘든 일이지만, 학교에는 이를 넘어서는 원죄가 분명 존재한다. 학교의 죄 하나. 지나치게 크다는 것. 한 학급의 인원이 50~60명에 육박하던 때보다야 낫긴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평가일 뿐이다. 학생들의 풍부한 성장을 직접적으로 도와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 담임교사라면, 한 학급의 인원은 20명을 넘어선 안 된다. 하지만 평균 35명의 학급 30개로 채워지는 일반적인 고등학교의 인원은 1천명을 훌쩍 넘게 되고, 교사는 자연스레 관리자의 역할을 강제 받는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거대한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목표 아래, 소위 ‘튀는’ 학생들이 최대한 통제되어야 마땅한 현실, 그게 바로 현재의 학교다. 둘. 주어진 교과목들. 흔히 사회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이야기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는 건 사회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입시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임을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걸 왜 배워야 해요?” 학습의욕이 없는 학생들의 불평불만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모순투성이로 가득한 것이 교과서이고 교육과정이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고 싶다면 대학입시를 최정점에 둔 표준적 커리큘럼의 주입이 아니라 개인적인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수능 고전문학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난설헌의 인생을 이해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해 ‘규원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진이 9월 현재. 진이(가명)가 자퇴를 하겠다고 한다.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학교 자체가 싫어서라고 한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아직 없다고 한다. 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대학에 갈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진이를 내보낼 수가 없다. ‘학교에서도 못 하면서 혼자서는 잘 할 것 같니’ 라는, 폭력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혼자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에 성공적인 자퇴생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아직 진이를 위한 공간을 찾지 못했다. 학교를 떠나려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 많이 불안하고,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될 수도 있는 일이라 걱정이 된다. 만일 학교가 아주 작다면, 그래서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포괄할 수 있다면,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중요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만나갈 수 있다면. 만일 학교가 아주 풍성하다면, 자신에게 의미 없는 것들을 의무적으로 배울 게 아니라 내부의 욕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 관점들을 깊이 있게 접한 후에 그 속에서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가정형인 것이 참, 슬프다. 나의 의문 진이를 통해 난 또 다른 의문에 부딪혔다. 왜 중고생은 휴학을 할 수 없는가? 일시적인 유보를 뜻하는 전학 말고, 엄하게 개인의 독립성을 시험하는 자퇴 말고, 차분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고 계획하고 정리할 수 있는 휴학. 대학생에게는 허락되면서 왜 중고생에게는 허락되지 않을까. 굳이 큰 질병을 앓아야만 한다면, 지금 진이가 앓고 있는 것도 아주 큰 아픔인데. 미성숙해서? 순간의 방황이니까? 아니, 더 솔직하게는 ‘학교라는 시스템을 원활하게 굴려야 하니까’ 라고 말하자. ‘행정편의를 위해서’ 라고 말하자. 이래도, 이래도, 학교가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못내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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