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빌려준 핸드북 크기의 육아책을 보다가 눈에 띈 내용. 네 댓 살 된 딸아이가 한창 마스터베이션에 열중이라 곤혹스럽다, 방석이든 밥상이든 모서리만 보면 갖다 대고 비비기에 여념이 없다, 어쩌면 좋으냐. 그 엄마의 마음을 동감했다. 아, 정말 곤혹스럽겠다, 얼마나 계면쩍을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말릴까. 내 딸이 네 댓 살 되기 전에 나도 자연스러운 방법을 마련해야겠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미처 고안하기 전에 일은 터졌다. 아이가 어느날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것이다. 오줌기저귀 가는 동안이었다. 처음엔 그냥 손 가는대로 만지작거리는 것뿐이었다. 코를 만지작거리듯,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듯. 그런데 오늘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짧은 오르가즘. 이 쾌감은 바로 이 부분을 만지면 된다는 걸 그녀는 직감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너무 시시했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고안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 자체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코, 입, 발을 발견하듯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것뿐. 이걸 두고 무어라 저지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코, 입, 발은 엄마가 먼저 가리키며 이게 뭐야? 해대면서, 거기는 아냐, 라고 한다니. 무엇보다 그 자연스런 쾌감. 부르르 몸을 떨며 웃는 그 얼굴. 아, 재미있는 느낌, 좋은 느낌, 이게 뭐지? 눈을 반짝이는 호기심. 나는 마스터베이션이란 정말 좋은 것이란 확신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이토록 쉽고 간편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걸. 하지만 이렇게 마스터베이션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얼마되지 않는다. 쉬쉬하며 숨겼고, 시치미 뚝 떼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른다는 세월이 내 인생에서 더 길었다. 여섯 살 무렵, 동생에게 “이렇게 해봐, 그럼 기분 좋아” 라며 나의 자위자세를 가르쳐주었던 것이 기억 난다. 만약 엄마가 보았다면 경악했을 그 행동은 그저 단순한 우호와 애정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내가 알고있는 재미있는 놀이를 가장 친밀한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여섯 살 아이의 어여쁜 마음이 있는. 그러나 곧 그 어여쁜 마음은 죄의식으로 변했고, 동생과도 자위자세 정보를 공유하지 않게 됐다. 그저 혼자 만의 방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지는 일이 됐다. 음지의 일은 정보교환이 늦거나 잘못되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인식과 솔직한 태도는 오도된, 혹은 과장된 호기심과 억눌린 욕구로 변하였고 그 후 오래 동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결과들을 초래했다(눈은 책에 꽂혀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느라 낭비했던 시간들부터). 고등학생 시절,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생물선생님이 짓궂은 질문을 하던 학생들에게 “그렇게 좋지 않으면 그 힘든 노동을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했던 대답이 생각난다. 섹스가 쾌락을 동반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왜 우리는 그토록 외면하며 죄의식에 찌들도록 금기시하는 걸까. 현실을 보자. 쾌락에 대한 선전은 넘쳐 나지만 정작 성인도 무엇을 어떻게 인지 모르기 일쑤고, 십대는 오도되고 과장된 호기심과 억눌린 욕구에 방황한다. 성행위는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순결이거나, 사랑이지만, 거기만 나서면 성매매 일색이다. 사회에서 하수구라, 배설이라 비유하는 것 말이다. 음성적이고 모순적이기 그지없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이중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을까. 열 여섯 춘향이 새 신랑 몽룡과 밤을 새우고 아침밥상을 들여보내는 엄마에게, 나는 밥도 싫소, 이것만 할라요, 라고 했다는 소설을 정규 국어교과서에 싣고 국민의 문학이라고 하면서도. 솔직한 성교육이 필요하다. 청소년에게뿐만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어른에게도. 이중적이고 모순된 성인식, 성관습으로 인해 작고 큰 피해를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곳을 나선 사회 어느 곳에서도 같은 목소리의 솔직한 태도가 음지의 것을 양지로 꺼내고 올바른 정보교환, 소통을 도울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에게, “너무 좋지?”하고 물었더니, “응”한다. 맞아. 너무 좋아. 엄마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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