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문학과 전복적 힘

가족이데올로기의 허구와 균열

김현주 | 기사입력 2005/01/31 [16:15]

고딕문학과 전복적 힘

가족이데올로기의 허구와 균열

김현주 | 입력 : 2005/01/31 [16:15]
“우리는 고딕적 시대에 살고 있다.” (앤젤라 카터)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의 신부>(1935)는 얌전하게 자수를 놓다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메리 셀리’에게 ‘바이런 경’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천둥소리에도 이렇게 겁을 내는 어린 소녀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생각해내게 되었을까.”

‘어린 여성’이 고딕소설을 쓰게 된 바탕

18살의 나이에 고딕 소설이자 최초의 SF소설로 평가 받는 <프랑켄슈타인
>을 창조해낸 메리 셀리는 1831년 개정판 서문에서 스스로에게 거의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다. “어떻게 어린 소녀가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게 되었을까?”

그녀는 시인 바이런의 장난스런 제안으로 공포 소설을 쓰게 되었고, 남편 퍼시 셸리가 그의 친구들과 당시 나누던 대화에서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는 등 주변 남성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퍼시 셸리가 쓴 1818년 초판의 서문은 메리 셸리가 이 작품을 쓴 목적이 “가족애의 다정함과 보편적 미덕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한 비평가가 혹평한 것처럼 ‘정신 이상자가 쓴 듯한’ 이 소설은 끔찍한 악몽을 경험한 후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교훈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의 가족이데올로기의 허구와 균열을 드러내는 측면이 강하다. 게다가 메리 셸리가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유사한 주제의 소설들을 계속 집필했으며, 당대 고딕 작가나 독자들 중 여성 비율이 상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린 여성’이 이러한 고딕 소설을 쓰게 된 바탕에는 ‘주변 남성들의 도움’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란 추측을 하게 한다.

고딕 소설은 18세기 후반, 서양에서 중세 고딕 문화와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긴 낭만주의 문학의 한 사조로, 주로 중세의 사원이나 성당의 비밀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음산하고 이교도적이며 비현실적인 환상 등을 다룬다. 최초의 고딕 소설로 불리는 호레이스 월폴의 <오틀란트 성>(1764)은 폭압적인 군주와 그에 의해 고통 받는 여성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악마적이고 초자연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사용된 ‘오래된 음산한 성’, ‘어두운 계단’, ‘비밀의 방’, ‘초자연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 ‘폭압적인 아버지’, ‘강제 결혼’, ‘절망과 공포에 시달리는 여성’, ‘귀족적인 분위기’, ‘지하 감옥’, ‘수도사’, ‘악마적인 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기사도적 정신’, ‘신화적 요소’ 등 소재들은 이후 고딕 소설들의 기본 요소가 된다.

일시적 일탈인가, 저항인가

월폴 이후의 고딕 문학은 여성작가들과 여성독자층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갔다. 이는 당대의 정치적인 상황보다는 사적인 문제, 즉 가족과 결혼의 문제가 더욱 현실적인 관심사였던 여성들에게 있어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 할 수 있는 핍박 받는 가련한 여성의 운명이나 낭만적인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 그리고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가 매력적인 현실 도피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맨스적 요소가 강화된 대중적인 고딕 소설이 대 유행을 하면서 “여성작가들이 마구 휘갈겨 쓴” 고딕 로맨스에 빠져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여성 독자들을”을 조롱하는 풍자화가 신문지상을 장식할 정도로 고딕 소설은 ‘여성화’된다. 심지어는 제인 오스틴도 <노생거 사원>에서 고딕 소설에 빠져 공상에 빠져있는 여성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많은 고딕 소설들이 악마적인 것, 과도한 욕망, 공포를 일으키는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하거나 혹은 로맨스적인 남성을 등장시켜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서 오히려 보수적인 현실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거나 일시적인 일탈의 공간으로 작용하여 현실의 결핍을 메우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문학 비평은 고딕 문학에서 다양한 전복적인 힘을 발견해낸다.

고딕 소설에는 모든 것이 평준화, 분업화 되어가는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불멸하는 초현실적인 영역에서만 진정한 아우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이는 현실도피, 혹은 허황된 상상력의 산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가속도를 내며 달려가는 자본주의 시계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시간을 걸어가는 것, 즉 부르주아 사회의 윤리와 합리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또한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악마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여성을 비롯한 소외된 자들, 즉 타자의 반영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메리 셸리는 ‘괴물’을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괴물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하여 괴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창조자에 의해 버려진 자식인 괴물은 사회와 가정에 정상적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기존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사회의 거부로 그가 자신의 타자로서의 운명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18세기 가족 중심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합리적인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 합리성이란 타자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윤리에 들어맞지 않는 욕구들을 억압하여 이루어낸 것일 뿐이다.

질서의 세계 아래 억눌려 있는 욕망의 세계

<오틀란트 성>에서 폭압적인 군주에 의해 희생당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은 한없이 무기력해 보인다. 이는 비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고딕적 공포의 효과를 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훌륭한 아내와 딸이라는 가족 내에서의 역할 수행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고, 진정한 욕망은 억압하며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어 겉으로는 화목하고 건전해 보이는 부르주아 가정의 기저에 어떠한 폭력성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게 된다.

샤롯 브론테의 유명한 작품, <제인 에어>에서 로제스터는 표면적으로는 상처를 안고 있는 낭만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숀필스 저택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다락방에 갇혀 있던 로제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 메이슨 때문인 것처럼 설명된다. 하지만 이방인이면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버사 메이슨은 차갑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제해 온 제인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제인은 여성의 욕망하는 자아를 숀필드 저택의 불길 속에 태워버린 후에야 로제스터와 낭만적인 결합을 하고 사회적으로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은 직접적으로 부르주아 가정을 위협한다. 그가 여성의 피를 빠는 것은 가학적이면서도 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그가 뱀파이어로 만든 여성들을 궁극적으로 자신의 일부다처적인 지배 하에 둠으로써 정상적인 가정윤리를 비웃는다. 또한 뱀파이어가 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게 되는데 여성의 욕망이야말로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윤리가 용납할 수 없는 타락의 방식인 것이다.

드라큘라 백작은 이교도적인 제의를 통해 제거되어 기존의 사회 질서가 회복되는 듯하지만 이 악마를 경험했던 평범한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이미 견고한 듯 보이던 질서의 세계 아래 억눌려 있는 욕망의 세계를 보았으며 그것이 남긴 충격과 매력은 지워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금기는 언제나 두려운 동시에 매력적인 것이다. 고딕 작가들의 의도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은 욕망들,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 것들에서 떨어져 나와 그로부터 안전한 사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험을 담으려 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때때로 작품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 자체의 무의식의 작동원리에 따라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고딕 세계는 조심성 없이 사람들을 금기 앞에 무기력하게 세워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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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솜이 2005/02/07 [14:21] 수정 | 삭제
  • 저도 히피문화부터 이분이 쓰는 글의 팬.
    정보도 많고 관점도 좋고 흥미롭다고 느껴요.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합니다.
    특이하고 신기한 글들.
  • 샹난 2005/02/04 [16:29] 수정 | 삭제
  • 라는 소설이 있어요 Jean Rhys가 쓴건데
    우리나라에는 번역본이 안나와있는걸로 알고 있긴하지만 원서는 있을거에요
    이게 그 '제인에어'에 나오는 버사 메이슨에 대한 책이에요 흥미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세요 재밌더군요
  • girl 2005/02/03 [15:23] 수정 | 삭제
  • 히피음악에 대해 기사쓰셨던 기자님이죠?
    그 때 기사도 정말 재밌게 봤어요..
    고딕문학에 이어서 고딕음악에 대한 기사도 기대되네요.
  • 고리 2005/02/02 [00:42] 수정 | 삭제
  • 문학에 대해 잘 아는 건 없지만, 이런 기사를 보면 가슴이 뛰어요. 다시 문학소녀가 된 느낌이죠.
  • 로망 2005/02/01 [20:22] 수정 | 삭제
  •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완전 내 취향)
    다음 번 기사는 고딕음악에 대한 거라니까 더 기대가 되네요.
  • ^^ 2005/01/31 [21:11] 수정 | 삭제
  • 고딕문학 연재기사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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