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역사를 말 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과거에 관한 단편적인 기억들은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획득하며, 시각적 기호들은 하나의 완결된 장면으로 정착된다. 영화는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이야기하며,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재구성된 과거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과거가 누구의 기억과 서사에 의지하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많은 영화들은 역사 속의 ‘아버지’에 주목한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한 시대의 권력을 지닌 남성 중심적 역사의 주체, 혹은 권력을 빼앗긴 훼손당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는 선포하는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민중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아버지의 역사에 의해 침투당한 여성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나치 정권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감독인 헬마 잔더스-브람스는 아버지를 이야기하기 거부하고, 어머니와 그 딸인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를 선택한다. 당시 여성들의 삶의 터전에 침투해 있는 ‘아버지’의 폭력성은 헬마 잔더스-브람스의 작은 역사에 의해 폭로된다. 어머니 레네와 딸 안나의 역사는 라디오 속 히틀러의 목소리와 실제 아버지인 한스의 귀환에 의해 끊임없이 간섭받는다. 그러나 한번도 이야기되지 않았던 그 억압의 역사는 안나의 서술에 의해 가시화된다. 안나는 레네와 한스가 만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레네의 삶에는 이미 커다란 나치당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이에 의해 간섭받지 않고자 한다. 하지만 침묵하기 만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레네는 나치의 개가 옷을 물어뜯어도 소리치지 못하며, 이웃이 나치에 끌려갔을 때에도 창문의 커텐을 닫아버릴 뿐이다. 그런 레네는 한스가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스와 결혼한다. 레네는 다정다감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만, 한스는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곧 징집 당한다. 레네는 사랑하는 한스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침묵하기의 방식을 고수한다. 실을 파는 유태인 할머니는 가게 안에 숨어서 살 수밖에 없지만, 레네는 한스가 휴가 나오는 날 입을 블라우스의 실 색깔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돌아온 한스는 섹스를 하기 위해 레네의 블라우스를 찢어버리고, 폭력적인 섹스를 거부하는 레네를 의심한다. 이 때부터 레네의 삶에 잔인한 역사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공습이 있던 날 레네는 안나를 낳는다. 핏덩이 안나는 폭탄을 쏟아내는 비행기의 이미지 속에서 태어난다. 무너진 집더미 위를 살피던 레네는 깨어진 거울 조각에 비춰진 자신을 보고 “저게 나였다”라고 말한 뒤 길을 떠난다. 삶의 터전을 파괴당한 레네는 더 이상 침묵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레네는 그 때부터 안나에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영화 속의 다큐멘터리 필름은 늘 파괴된 잔해를 보여주지만 이 때 들리는 안나의 나레이션은 즐겁다. 레네와 안나는 함께 목욕을 하고 춤을 추며, 놀이를 한다. “레네와 나는 탕 속에서 서로 사랑했으며 마녀들이 지붕 위를 날 듯 날았다. 레네와 나, 나와 레네. 전쟁의 한가운데서.” 안나는 레네와 함께 피난을 다니던 이 시간들을 ‘정말 잘 지냈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레네가 안나에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으며, 아버지에 의해 간섭당하지 않은 어머니와의 삶에 대한 안나의 기억이다. 안나가 커가자, 레네는 살인자 신랑을 고발하는 신부의 이야기인 “도적신랑 이야기”를 해준다. 영화는 안나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레네에게 오랜 시간을 허락해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레네는 군인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어린 안나는 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런 안나에게 레네는 “강도와 강간은 정복자들의 특권”이라고 이야기하고 “도적 신랑 이야기”를 계속한다. 레네는 안나와 함께한 피난길 속에서 점점 야위어 간다. 그러나 레네는 안나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전쟁보다 더 중요하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끝나자 안나는 “평화란 우리에게 어떤 걸까”하고 묻기 시작한다. 한스는 돌아왔지만, 안나는 이에 대해 “바깥에서 평화였을 때 안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회상한다. 어쩌면 전쟁보다 더 가혹한 아버지의 귀환은 안나와 레네의 삶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안나는 한스 친구의 장난으로 인해 한스에게 매를 맞는다. 한스는 글씨 연습을 하는 안나에게 더 바르게 쓰라고 화를 내고, 안나는 그 뒤로 언제나 글씨만 쓰고 있다. 안나의 글씨체는 지나치게 반듯해져 갔다. 한스와 레네의 섹스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한스는 걸핏하면 레네를 의심한다. 전쟁은 한스에게 억압하고 통제하는 아버지의 모습만을 남겨두었다. 한스의 억압으로 인해 레네는 안면마비 증상을 보이게 된다. 의사는 애꿎은 이를 탓하며 이를 모두 뽑아버리자고 한다. 레네는 거부하지만 한스는 이를 뽑으라고 지시한다. 한스와 남자 의사에 의해 이를 모두 뽑히고 돌아온 날, 레네는 자신을 위해 스프를 끓여온 안나의 얼굴에 스프 국물을 뿌려버리고 만다. 레네는 마비된 한쪽 얼굴을 검은 스카프로 가린 채 점점 우울과 분노에 시달려갔다. 레네는 한스에게 사랑을 원한다고 울부짖지만 한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유모차를 끌고 노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안나의 모습은 전쟁 중이었지만 레네와 단 둘이 지내던 과거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안나는 아버지들이 주도하는 식사 시간 중에 똥을 싸고 마는데, 이는 가혹한 아버지상으로 인한 퇴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레네는 안나에게 성공적으로 말하는 방식을 가르친 것 같다. 아버지에 의해 침투당한 어머니의 역사는 안나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일인이었지만 동시에 국가라는 아버지 형상의 피해자였던, 또한 전쟁이 끝난 뒤에 남편이라는 또 다른 아버지 형상의 피해자였던 여성의 역사다. 헬마 잔더스-브람스의 1979년 작인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아트 큐브에서 상영 중이다. 과거 어머니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배운 후대의 여성이 재구성한 어머니의 역사가 또한 후대의 여성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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