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밀어버리는 ‘신화’

빈민가에서 맨하탄으로

윤정은 | 기사입력 2005/03/29 [00:46]

가난을 밀어버리는 ‘신화’

빈민가에서 맨하탄으로

윤정은 | 입력 : 2005/03/29 [00:46]
“누구인가, 선착장과 빈민가를 맨하탄으로 만든 이가.
미국에 맨하탄이 있다면 대한민국엔 **이 있습니다.”

아직 이런 개발 신화가 텔레비전 광고로 버젓이 우리 눈앞을 휘젓고, 귀를 통해 들어오는 이 문장들이 머리를 지배하려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이미지를 심어주고 눈 앞에 휙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빈민가의 비루한 삶이나 빌딩숲을 누비는 화이트 칼라 계층의 삶 중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겠거니 넘어가려다, 섬뜩한 두려움에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서야 아토피 피부염이나 암과 같은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인한 질환들로 인해 개발과 발전의 문제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로 다가오지만, 비단 십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우리의 건강이나 삶은 개발이라는 불도저 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삶의 공간이 한 순간에 포크레인에 위해 때려 부숴져 내몰리는 데에도 그것이 ‘더 잘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줄 알았다.

지난 해 겨울 만났던 한 흙 건축가는 “아파트 재건축된다는 소식에 ‘축 재건축’ 이런 플래카드를 붙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거다. 삶의 공간이 한 순간에 부서지는데 다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고 무조건 쌍수를 들고 환영하다니…”라고 말했다.

살던 아파트가 부서지는 걸 환영하는 것은 실은 집이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재산상 의미로, 투기의 대상으로서 집값이 오르는 걸 기뻐하는 것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새집에서 살면서 오래된 집보다 편리하겠고 집값도 오른 걸 기뻐하겠지만, 곧 가족들이 “콘크리트 독 때문에, 새집증후군 때문에 고생한다”며 하소연하는 걸 자주 목격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꿈꾸던 맨하탄의 콘크리트 숲이 반대로 우리를 공격해온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 만났던 한 건축과 대학원생은 자신이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모 건설기업의 재건축 공모전에 응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모전은 서울의 어느 지역을 선정하여 이 지역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설계해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대상지역의 규모는 3,4개 동에 이르는 넓이였다.

그녀는 설계에 앞서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지역 답사를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이 공모전의 취지가 무엇인가? 실제로 그 넓은 지역에 재건축 계획이 수립되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건 아니고, 잘 나가는 건설기업이 학생이나 시민대상으로 거액의 상금을 걸고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추측했다.

그녀가 그 지역을 직접 현장답사하며 촬영한 사진들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의 장면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으로 살아 하늘거리는 풀들이며, 좁은 공간에도 화분을 내놓아 주변을 꾸민 정성이며, 가을 햇살을 받으며 널린 빨간 고추들, 빨래들… 그녀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그 공간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순간 ‘가난한 동네지만 이런 삶의 아기자기함을 사진에 담고 지역 주민들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눠본 당신이 거기를 밀어버리고, 지금의 삶과 단절된 전혀 다른 공간으로 재건축하자는 공모전에 왜 프로젝트를 내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삶의 이야기들이 스며있는 공간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더 잘 사는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아직도 가난을 한 순간에 밀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잃어버리는 시간과 공간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더 잘 살고 싶은 신화를 믿고 ‘축 재건축’ 플래카드를 내건다. 이렇게 삶이 위협 받는 이 순간에도 말이다.

 
신화 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얘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과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발 신화는 계속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빈민가에서 맨하탄. 한 순간에 이런 비약이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는 아직도 그 대가를 누가 치르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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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바람 2005/03/31 [15:54] 수정 | 삭제
  • 빈민가가 맨하탄이 되는 비약이 과연 성공신화라고 할 수 있겠어요
    돈을 만지는 사람들만을 위한 신화일 뿐이죠.
  • 트리 2005/03/29 [01:08] 수정 | 삭제
  • 많이 공감해요.
    재건축이라는 이름 무섭고 슬퍼요.
    지은지 삼십여년이 다 되어가서 녹물이 나오는
    그런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같이 자란 동네의 나무들만으로도
    마음 한 켠 기뻐지곤 하는걸요.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플래카드를 내걸고
    총회를 열고 하는 것들을 볼때마다
    정든 동네 생각을 하며 깜짝깜짝 놀래요.
    이 공간이 사라진다니, 모조리 허물어진다니
    생각할때마다 슬쩍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애요......
    주택이 모자라 고층으로 고층으로 집들을 쌓아올려야 한다하면
    집이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집이 늘어나면 뭐하나, 거기 살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여전히 없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큰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하게 될만치
    조금의 이익이라도 있다면 그걸 먼저 찾게 되는
    어려운 삶들을 생각해도
    참 답답하고......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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