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빨래하는 여성들의 삶

골목골목뮤지컬 <빨래>

윤정은 | 기사입력 2005/04/19 [05:20]

우리 시대 빨래하는 여성들의 삶

골목골목뮤지컬 <빨래>

윤정은 | 입력 : 2005/04/19 [05:20]
내용과 제목이 연결이 안돼, 작품을 보고 난 뒤 곰곰이 제목을 떠올려볼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을 보면서는 ‘제목이 왜 빨래일까?’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 나영은 빨래를 널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빨래를 널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가 이웃집 남자 이주노동자 솔롱거와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무대 맨 꼭대기에는 빨래 줄이 내내 걸려있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20대 직장여성, 동대문에서 옷 장사하는 40대 아줌마, 괴팍한 주인집 60대 할머니. 이웃집에 사는 세 여자들이 심지어 빨래를 같이 하며, 주제가인 ‘빨래’ 노래까지 부른다.

창작 뮤지컬 <빨래>(명랑씨에터 ‘수박’ 작)는 그간 대형뮤지컬이 주도하고 외국 번역물만이 인기를 끌었던 국내 뮤지컬계 현실을 고려해보면 분명 신선한 의미를 주는 작품이다. 제작비 규모가 억 단위에서 십억 단위까지 오르내리는 대형 외국 뮤지컬에게 길들어져 온 관객들에게 ‘골목골목뮤지컬’ <빨래>는 “으리으리한 대극장에서 시골학교의 운동장까지 관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기존의 뮤지컬이 제작비의 수지타산을 위해 5만원 대의 관람료로 관객을 붙들어놓으려고 오락성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만을 주로 다뤄온 반면, <빨래>는 뮤지컬 주제의 폭을 확장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기도 하다.

<빨래>는 서울살이 하루 하루를 담은 일기다. 저부가가치 인생으로 여겨지며 무시당하는 직장여성과 이주노동자, 그리고 장애인인 딸을 양육하며 박스를 주워 모아 악착같이 살아가는 할머니 등 고단한 일상을 사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들이 때론 악다구니와 폭력으로, 때론 옥상에서 바람에 날리는 빨래들처럼 일상적인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뮤지컬이 진행되는 두 시간여 동안 젊은 배우들은 일인 다역을 하며, 가난한 동네와 시내의 서점과 반지하방과 옥상을 오르내리며, 역동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낸다. 배우들의 열연뿐 아니라 관객의 귓가를 잔잔히, 때로는 가슴을 울리며 흘러 드는 노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르멘> 등 창작뮤지컬을 꾸준히 해온 음악감독 신경미씨가 맡았고, 건반, 드럼, 기타, 베이스 등으로 이루어진 밴드가 라이브로 연주를 들려준다.

관객들은 좁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광경, 서울살이가 고달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좁은 골목을 보며 20~40대를 막론하고 눈물을 훔치곤 한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영이 일하기에 불편한 짧은 스커트 유니폼을 입고 권위적인 사장에게 성희롱 당하는 장면에서는 20대 여성관객들의 야유가 터져 나오고, 나영네 맞은편 옥상에 사는 이주노동자 솔롱고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한국남성들에게 뭇매를 맞을 때는 40대 여성들이 눈물 흘린다. 끝내 나영이 직장에서 동료가 부당해고를 당해 함께 항변하다가 서점 창고로 쫓겨날 때는 그들의 처지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처지라는 생각에 함께 분노하게 된다.

<빨래>를 본 관객들은 무대 막이 내리기 전에 특히 여배우 3인의 연기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 뮤지컬이 여성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마도 여성연출가에 의해 만들어진 뮤지컬로서, 여배우들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사는 여성들의 삶을 잘 드러냈다는 이유가 아닐까.

연출을 맡은 추민주씨는 이미 <쑥부쟁이>, <열혈녀자빙허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작업에 담는 연출가다. 특히 지난해 12월에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뮤지컬 <쑥부쟁이>는 집 나간 아버지와 허리 아픈 어머니의 맏딸로 일고여덟 명에 이르는 남동생들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여성캐릭터를 잡아 국악, 유행가, 팝송, 트롯을 소화해나가며 호소력 있게 ‘이 세상 여성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추민주씨가 연출한 또 하나의 작품인 이동마당극 <열혈녀자빙허각>은 조선시대 여성으로 남편과 대등하게 시를 주고 받는 등 학식이 뛰어나고 자의식이 강했던 빙허각 이씨를 뛰어난 실학자로 재조명했던 작품이다.

<빨래> 공연장은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이며, 4월 14일부터 5월 1일까지 계속된다.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일 오후 4시, 7시 30분. 문의 02-762-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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