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수용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포플러의 가을>과 <그리운 메이 아줌마>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08/29 [21:55]

죽음을 수용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포플러의 가을>과 <그리운 메이 아줌마>

김윤은미 | 입력 : 2005/08/29 [21:55]
가까운 이의 죽음을 수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상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죽은 이가 사라지고 난 뒤에 생긴 결핍과 허무함을 자신의 힘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른과는 다른 차원의 정서적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유모토 가즈미의 <포플러의 가을>과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는 죽음을 수용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어린이문학이다.

<포플러의 가을>은 주인공 치아키가 포플러 장 주인 할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 시작된다. 치아키에게 포플러 장 할머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치아키는 여섯 살 때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포플러 장으로 이사 온다. 집과 학교와 주변 인물이 모두 바뀌어 낯선 환경에 던져진 채 치아키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해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아버지는 만화책에 나오는 덜렁이처럼 뚜껑 달린 맨홀 속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엉뚱한 상상은 곧 현실로 발전한다. 치아키는 아버지처럼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매사 긴장하며 살다가 결국 건강이 나빠진다.

아픈 치아키는 포플러 장 할머니에게 간호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센 할머니가 낯설지만 점점 친밀해진다. 치아키는 할머니에게 비밀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배달할 수 있는 저 세상의 편지 배달부라는 것이다. 치아키는 죽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할머니에게 맡기기로 결심한다. 편지는 곧 그녀가 죽은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이 된다. 성당의 예수 상을 보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를 고민하는 등 그녀는 점차 아버지의 죽음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아빠는 어디선가 예전처럼 조용히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고 있는 거죠?”하고 생각한다.

<포플러의 가을>은 치아키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담아낸다. 완벽하게 죽음을 잊고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는 식의 결론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생긴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자신의 성격적 문제점 등을 성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결론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한 소설은 특징적인 풍경이나 말 한마디, 특정한 장면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쉬운 아이들의 기억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치아키의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준 달콤한 찹쌀떡과 양갱의 맛, 사람들이 할머니의 정원에 모여 고구마를 구워서 먹는 평화로운 광경, 포플러 장에서 보낸 삶에서 가장 조용한 여름 등은 치아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된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는 메이 아줌마를 잃은 서머와 오브 아저씨의 이야기다. 서머는 매우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나서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오브와 메이 부부의 손에 맡겨진다. 바람개비를 만드는 예술가 오브 아저씨와 자상한 메이 아줌마는 서머에게 사랑을 베푼다. 그런데 메이 아줌마가 갑자기 죽은 후 상황이 변했다.

오브 아저씨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우울증에 빠지고 서머 또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오랜 세월을 외톨이로 지냈던 나는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만나 지낸 세월 자체가 바로 죽어서 간 천국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멋진 일이 어떻게 나한테 또다시 일어난단 말인가.”

이들에게 서머 또래의 괴짜 아이 클리터스가 나타난다. 사후 세계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클리터스의 말에 오브 아저씨는 흥분하며 메이 아줌마의 영혼에게 말을 걸어달라고 부탁한다. 황량한 밭에서 그들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메이 아줌마의 영혼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 대신 서머는 메이 아줌마를 잃은 슬픔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클리터스는 영혼을 불러내는 심령 교회에 가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심령 교회의 목사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대신 여행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온 몸이 아플 정도로 울면서 아줌마를 잃은 슬픔을 느낀 후 비로소 서머는 평온함을 느낀다.

두 소설은 누군가를 상실한 아픔에 친숙해질 정도로 충분하게 아파하는 것, 그것이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지나다 2005/09/02 [11:33] 수정 | 삭제
  •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되는 나이가 몇 살일까 모르겠습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되는 그 즈음일까요. 아주 가까이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사라져버리고, 어른들이 울고 무언가 말해주지 않는 그런 경험을 하게되는 건, 아이는 슬프다기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약간은 다시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 아는 나이 대 어린이들이 상처를 깊이 받을 수 있지요. 아픔에 대해서도 겪어나가는 것, 조금 빨리 겪는 아이들에 대한 배려도 기울였으면 싶네요.
  • 하늘 2005/08/30 [07:01] 수정 | 삭제
  • 슬프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