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자유로 만족할 수 없다

노예들의 모세로 불렸던 여성, 해리엇 터브먼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12/05 [22:31]

혼자만의 자유로 만족할 수 없다

노예들의 모세로 불렸던 여성, 해리엇 터브먼

김윤은미 | 입력 : 2005/12/05 [22:31]
소수자들의 자유를 갈구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묵직한 울림을 갖추고 있다.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또한 그 여성들의 일원에 포함될 인물이다. 그는 남북전쟁 전 약 300명의 노예들을 탈출시킨 신화적인 흑인여성이다.

▲ 남겨진 해리엇 터브먼의 사진과 목판 그림 
해리엇 터브먼은 1820년 메릴랜드의 벅톤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부모가 노예였던 까닭에 그 또한 노예였으며, 5살부터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많은 흑인노예들은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떠났는데, 정의감이 넘쳤던 그는 15세 때 도망치는 노예를 돕기 위해 감시관에게 반항하다가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 크게 다치고 만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갑작스레 잠이 쏟아지는 수면발작에 시달리게 된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노예들의 모습은 어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스물아홉 살이 된 해리엇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북부의 백인 일부와 탈출한 흑인들이 만든 비밀조직으로 남북전쟁 전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로 떠나 자유민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는 혼자만의 자유로 만족하지 못했다. 펜실베이니아로 탈출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몸이 된 나는 과연 여기 서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 손을 쳐다보았다. 사방이 온통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였는데, 태양은 마치 황금처럼 나무들 사이로, 벌판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자유였다. 하지만 자유의 땅에 발 디딘 나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낯선 곳에 온 이방인이었고, 내가 살던 집은 정든 이웃들과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저 아래쪽의 오두막집 동네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곧 엄숙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자유였고, 그들도 나처럼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 북쪽에 그들을 위한 집을 짓고, 신의 가호가 있다면 그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다.” (<레볼루션>(출판사 미토)에서 재인용)

해리엇 터브먼은 펜실베이니아에서 노예폐지론자들을 만나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일원이 된다. 노예들의 탈출은 목숨을 건 간절한 시도이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기나긴 여행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추적하는 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다양한 트릭을 썼다. 노예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개를 이용했다. 그래서 길에 후추를 뿌리거나 물을 따라 걷는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노예들은 법적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노예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도구로 여성들의 ‘퀼트’가 활용됐다. 특정한 패턴이 수놓아진 퀼트가 창문에 걸려있으면, 노예들은 그 패턴을 읽어내어 언제 떠나고, 언제 숨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해리엇은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메릴랜드로 다시 돌아가서 가족들을 포함한 많은 노예들을 하나, 둘 탈출시킨다. 그는 1850~1860년 사이에 19차례나 노예 탈출을 시도했다. 그 또한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 트릭들을 썼다. 어느 날, 노예들과 막 기차를 타려고 할 때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 그러자 해리엇은 노예들을 남쪽 행 기차에 태워 보내어 의심을 피했다. 메릴랜드에서 노예 소유주와 마주칠 때면, 해리엇은 재빨리 닭을 사서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닭들이 털을 날리며 뛰어다니면 노예 소유주들은 닭을 피해 걸어갔다.

그는 단 한 번도 노예 탈출에 실패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북쪽으로 떠나는 도중에 노예들이 두려움에 마음이 약해지면, 해리엇은 들고 있던 총으로 그들을 겨누며 “자유와 죽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그가 총을 쏜 적은 없지만, 결단력을 환기시켜줌으로써 노예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860년대가 되자 해리엇은 노예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모세’로 알려지게 된다. 1863년 그는 여성해방운동에도 지지 연설을 펼치는 등 소수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노예제 폐지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해리엇은 북측의 정보원으로 일하는가 하면 병원에서 병사들을 간호한다. 뿐만 아니라 150명의 흑인 군인을 직접 이끌고 싸워 약 800여명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돈을 모아서 나이 들고 갈 곳 없는 흑인들을 위해 집을 지었다.

해리엇의 일생은 이후에도 차별 철폐를 외치는 수많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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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19/02/08 [18:54] 수정 | 삭제
  • 여성 위인들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tara 2005/12/07 [08:22] 수정 | 삭제
  • 멋진 얘기네요.
  • 은수 2005/12/07 [00:59] 수정 | 삭제
  • 구약의 모세는 신의 대리인이죠. '노예의지'(servant will)로
    세속사를 실행해왔던.
    자유의 땅에서 이방인이라면 아직 자유를 찾은 게 아닐수도 있겠군요.
    일원이 될 수있는 일종의 의식(ceremony)에 참여해야(그런것같아요)
    그는 그 땅을 '밟은'게 되겠지요. 타인들의 '해방'시킬 수도 있겠고.
    해리엇이 어떤 동기로 '노예해방'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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