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서 헤엄치는 아이들

‘무반덱’에서 교육의 희망을 건지다

장미 | 기사입력 2005/12/26 [19:31]

콰이강서 헤엄치는 아이들

‘무반덱’에서 교육의 희망을 건지다

장미 | 입력 : 2005/12/26 [19:31]
경건할 수밖에 없는 아침이었다. 한 스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명상과 요가를 하는 것이 첫 일과였는데, 물안개 피는 콰이강이 앞에 흐르고 있었고, 향내가 났으며, 어느 참가자가 피리를 불고 있었다. 이렇게 태국 아이들의 마을학교 ‘무반덱’(Moo Baan Dek, The Children's Village School)의 하루는 시작됐다.

교육은 “스스로 움트게 하는 것”

1999년 12월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아이들을 위한 평화문화 만들기’라는 대안교육 국제심포지엄. 끔찍하게 더웠던 한 낮. 몽롱한 상태에서 참가한 각 세션 강의와 그룹토의들. 그러나 그 아침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온 것이 아니라 무반덱을 체험하고 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무반덱은 우리를 끄는 힘이 있다. “아이들은 씨앗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햇볕과 물, 흙의 양분이 필요하지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움트게 하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싹을 틔우게 하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그건 씨앗 스스로 하는 거니까요.”

Rajani Dongchai는 이렇게 말했다. 타이 전통의상을 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 온화한 미소로 참가자들을 대하며 짧게 맺음말을 하던 그녀가 현재 무반덱의 교장선생님이다. 남편이자 동지이고 설립자인 Pibhop Dongchai는 무반덱 재정을 지원하는 아이들을 위한 재단 의장을 맡고 있다. 1979년 설립된 이래 정부의 돈을 받지 않고 20년 넘는 세월을 버텨온 무반덱은 전 세계 개인들과 민간단체들의 지원으로 성장해왔다.

대자연의 품에 안겨 ‘상처’ 치유해

무반덱의 교육철학은 두 개의 기둥 위에 놓여 있다. 그 하나는 ‘자유’와 ‘자치’라는 영국 썸머힐학교 닐(A.S Neills)의 교육사상이다. 아침밥을 굶어도 좋다면 늦잠을 잘 수 있고, 정해진 시간에 각 수업장소에서 다양한 활동들이 열리지만 스스로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하루 종일 나무그늘 아래서 놀아도 좋다.

그러나 공놀이를 하다가 수업중인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가 되는 소란을 피웠다면 ‘학교의회’에 회부되어 벌칙을 받게 된다. 의장인 친구는 변론의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학습권을 침해한 행위’는 모든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제제를 당하게 된다.

닐 교육사상과 더불어 불교적 인간관은 무반덱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다. 교사는 이끄는 자가 아니라 함께 배움의 길을 떠나는 동반자이며,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의 악함을 누르고 선함을 발현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란 생각,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가능한 한 많이 자연을 접하며 생활하도록 지원한다는 점들은 불교의 색채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루는 무반덱을 품으며 돌아 흐르는 콰이강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했다. “하루 중 오후의 수영시간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지요. 우리 아이들은 매일 물에서 놀이를 하면서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조용한 아침 숲길을 걸으면서, 제 먹을 것을 기르며 대자연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평온함을 느끼지요.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결국 대자연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거예요.”라고 그 곳 선생님이 말했다.

무반덱은 아이들의 ‘치유’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자연 속에서 겪는 체험, 자연재료를 이용한 도예, 목공, 실 잣기 등의 활동과 노래와 춤, 그림 그리기 등 예술영역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이 이 공동체 마을학교에 오게 되는지 안다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무반덱에는 아동폭력, 성학대, 유기, 가출, 노숙, 고아 등 어린 시절 커다란 상처를 가진 약 3~20세 아이들 150여명이 교사와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20여명의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다.

한두 명의 어른들이 10여명의 아이들과 가정을 이루어 지낸다. 가정이 되고, 학교가 되고, 자연 속 마을이 되면서 무반덱은 아이들이 성장의 아픔을 넘어서도록 도와왔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하고 독립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학교담장 넘어 가정과 마을과 사회로

나는 아직도 “한국에서 왔어요. 태국 말을 못해요.”라고 어설프게 태국 말을 했던 내게 “It's okay”하고 깔깔거리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웃음소리와 수줍음 많던 눈빛들. 해맑다는 표현이 딱 맞을만한 그 얼굴들. 나를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아이들과 웃고, 수영하고, 산책하고, 밥 먹으면서 왠지 모를 겸허함과 경건함을 경험했다. 무반덱은 나 스스로를 차분히 돌아보도록 했고, 아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했다. 무엇보다 그 존재 자체로 희망을 보여줬다.

6년 전 그곳에 갔을 때 나는 대안중학교를 준비하는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 후 두 곳의 대안학교에서 과학선생을 했고,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그 동안 교육에 대한 고민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마을과 사회 그리고 가정으로 확대됐다. 앞으로 또 다른 대안학교 준비팀에서 활동하려고 하는 나에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우리의 대안교육, 대안학교 현장에 직접 부딪히면서 때때로 무반덱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 그런 곳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완 여러 가지 지형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무반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땀 흘려 그곳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조용히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지혜와 정보를 나누고 서로의 실천을 격려하고 연대하며 각자의 활동에 힘을 더하고 있다. 보다 평화롭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정, 학교, 사회가 유기적으로 녹아있는 무반덱에서 희망의 실낱 하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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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을 2005/12/31 [01:25] 수정 | 삭제
  • 교육을 하는 곳에서 갖춰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선순위가 무엇인가에 대해 교육자들이나 부모들이나 망각하고, 고민하지도 않고 입시제도에만 매달려있는 현실에서 작은 깨우침을 주네요.
  • k의고백 2005/12/28 [15:28] 수정 | 삭제
  • 천혜의 자연적 조건이 갖춰진 곳에 살면서도 집에만 갇혀 있었다지요.
    저 아이들은 강가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아침 숲의 냄새를 맡고 친구들끼리만 어울리는 시간들이 있을 것 같아 보여요.
    저는 꿈에서만 그래보았죠.

    요즘도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는 분들 보면 안타깝죠.
    부모가 시간이 없고 여건이 안되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자유롭게 노는 게 배우는 거죠.

    기사에 나온 태국의 아이들. 부모에게 버림을 받으면 슬프고 외롭겠지요.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거에요.
    그러나 과연 무엇이 사랑이고, 보호인가요.
    부모의 사랑보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이 더 따뜻할 수도 있어요.
  • 해리 2005/12/27 [15:10] 수정 | 삭제
  • 대안교육도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이념을 무엇으로 하고 구성원이 어른이든 아이든 그 원칙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내세우는 것만 근사하고 아이들에게 사랑도 주지 못하고 자치적으로 사는 방법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도 일깨워주지 못하는 곳들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사에서 학교의회 얘기가 나왔는데 우리의 경우 한다해도 얼마나 형식적인가요. 아마 무반덱에서는 아이들이 뿌리 깊이 습득되어 학교의회의 방식이 자연스러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의장을 맡은 친구는 징계를 결정하고 투표를 하기 이전에 변론의 기회부터 주겠지요. 그래야 아이도 억울한 마음을 가지기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인정하기 쉽고, 다른 아이들도 개인의 욕구 때문에 다른 아이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걸 더욱 굳게 생각하게 되겠지요.
  • 까페디엠 2005/12/27 [05:08] 수정 | 삭제
  • 예전에 썸머힐학교에 대한 방송을 보았는데 (책도 보았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썸머힐학교는 실패였지 않냐면서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는 교육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분을 보았다.
    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썸머힐학교의 교육적인 방식을 실패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도 같이 가르치는 교육이 가장 좋은 것 같다.
    무반덱의 아이들이 부럽다.
    썸머힐보다 자연친화적으로 크는 것 같아보인다.
    어렸을 때 저런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 p 2005/12/26 [23:30] 수정 | 삭제
  •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가족의 품보다 더 크고 따스한 자연의 품에서 위안을 얻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군요. 무반덱의 교육철학이 마음에 들어요. 무반덱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보다 가난해도 훨씬 더 행복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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