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 자란 후

연극배우 김수아

윤정은 | 기사입력 2006/01/17 [02:51]

어릿광대 자란 후

연극배우 김수아

윤정은 | 입력 : 2006/01/17 [02:51]
그래, 광대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장면을 정지시켜놓고 보면, 그때 그 사람은 ‘진지한’ 이런 단어가 어울릴 법하고, 이상을 꿈꾸는 ‘꾼’의 모습이었다. 아냐, 그래도 광대끼가 있었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어느 여름날 저녁. 나무그늘 아래서 맥주를 한 병째 마시고 있을 때,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혼자 하늘거리는 나뭇잎을 올려다 보며 “얘들 봐,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라고 소근거렸다. 그때 표정은 마치 나뭇잎에게 “난 심각한데, 씨~ 너 지금 나한테 왜 자꾸 말 걸어?”라며 한마디 할 태세였다.

6개월 광대로 살다

늦은 밤, 사람들이 다 떠난 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팔짝팔짝 뛰어 다녔다. 날고 싶은 광대였지만, 그땐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어설펐다. 아직은 세상과 어울려 한판 놀지 못하는. 장난 쳐보고 싶지만 상대가 어떤지 몰라 슬쩍슬쩍 장난치다가 말아버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면서도 껍질이 깨지는 고통이 너무 아플까봐 테두리의 선을 밟고 심각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하는, 그러나 슬쩍슬쩍 보이는 웃음은 어쩔 수 없는.

광대는 지난 6개월 동안 “공연을 시작하면 마치 거기서 살 것처럼 극장 무대를 다 뜯어서 우리 세계를 만들고” 거기서 웃고 울고 살았다. 심지어 객석 하나하나까지 손으로 훑고 어루만지고 숨결을 불어넣어 빚을 만큼 극장 안의 세상에서만 살다가 “그것이 싹 걷어져 버렸을 때 ‘헛헛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면 배우로 살 거지?”
“엉(헤~). 단답식 좋다. 앞으로 그렇게 하자.”

수아는 지난해 6개월 동안 가족극 <하륵이야기>에서 광대였다. 그 동안 그가 했던 연극 몇 편을 봤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익살스럽고 장난끼 어린 광대 표정과 몸짓에 공연을 보고선, 볼 때마다 흥미진진한 연극 속으로 푹 빠져버리곤 했다.

“혼자 놀면서 내 세계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 사람들이 탄성 지를 때의 쾌감. 말하는 정극 연극보다는 어릿광대 연극에 더 끌렸던 것 같아. 이 극단 들어와서 그것과 많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 내 옷이구나, 라는 느낌.”

사람은 꿈이 없어 죽는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내 안의 광대야 자라나거라.”

수아가 2005년 6월 3일에 3개월의 장기공연을 앞두고 쓴 일기 중 한 대목이다. 중국 공연을 끝으로 대장정의 공연이 막을 내릴 때까지 자기 안의 광대가 태어나 자라고 뛰고 놀 수 있도록,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얼마나 읊조렸을지 눈에 선했다.

“내가 하는 공연으로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 하나 더. 내가 하는 공연이 자연친화적인 끈을 끊임없이 놓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어.”

어느 날 일기에도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꿈이 없어 죽는다”라고 쓴 것처럼, 그에겐 자신의 꿈에 대해선 고집이 있었다. 계획에 있어 성실하고, 치열하다. 어느 것 하나 건너뛰는 법 없이 치열한 내면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한 발자국 다가서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내가 네 살 무렵에 맨 처음 배우들이 하는 공연을 처음 봤는데, 우리 동네에 종합예술학원 같은 게 생겼어. 거기서 오프닝 퍼포먼스를 하는데 어느 대학에 있는 배우들을 섭외해서 한 모양이야. 배우들이 노란 타이즈를 입고 알에서 새가 태어나는 퍼포먼스를 했지. 그런데 관객 속에 있던 나에게 오더니 내 안경을 벗겼다가 되돌려주곤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어.”

그 전부터 유치원에서 “연극 배우 하겠다”던 아이는 배우들이 자기 앞에 와 서있던 이 장면에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충격을 몹시 받았던 안경 낀 4살짜리 꼬마는 자라나 연극 배우가 됐다. 연극을 시작한 지 약 1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아이들이 공연 한 편을 보고 정서적인 충격을 받아가는 것이 좋았어. 내가 그랬어. 도시에서 살다가 산에 가서 단풍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면 충격 받잖아. 쉽게 말해서 감동이지.”

배우를 꿈꾸던 아이는 혼자서 누가 가르치고 지도하지 않아도 자기 안의 광대를 살리고,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보살폈다. 매년 설 연휴가 되면 텔레비전에서 으레 보여주는 서커스 공연을 보고 광대들의 몸동작을 따라 하며 놀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심심할 때면 혼자서 마임을 만들어 놀았다. 수학여행 때 껌 떼는 동작, 줄 넘기 하는 동작 등 그 동안 혼자 하던 놀이를 사람들 앞에 선을 보였는데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는 쾌감을 느꼈다고.

나를 다듬고, 벼르다

“올해는 보따리 장사다”라고 말하는 그는 당장 다음 달부터 김해부터 시작해 전국 순회 공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일랜드, 캐나다 등지의 해외공연도 갈 예정이다. 지난 한 해 ‘아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해야 할 자신이 “공연을 접해보지 않은 아이들이나 나도 준비가 안된 것 같았고, 오히려 내가 더 떨리고” 했다며, 지금은 더욱 자신을 “다듬고 벼르고 있다”고 말했다.

워낙 하루의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진 사람이었는데, 올해는 자신을 ‘벼르느라’ 더 바쁜 모양이다. 성악레슨과 스네어드럼을 배우고 있고, 그 동안 멈췄던 장구도 다시 시작했다.

“그게 너무 행복해. 하다 못해 걸음걸이 하나도 생각하게 되고, 일상생활 하는 것보다 작고 미세한 그런 것에 더 정열을 쏟는 거지. 나에 대해 더욱 미세하게 관찰하는 거, 사는 데 도움이 되는 태도라고 생각해. 그렇게 뭐든 자꾸 배우고 준비하면서 살고 싶어.”

그는 1년 전에 비해 지금 또 변해있었다. “그때는 계획했던 것에 더 많은 노력을 했다면, 지금은 그 전에 사놨고, 열심히 줄 그어 놓았던 책들을 요즘은 필요에 의해 부분부분 꺼내 보는 느낌” 같다고 했다. 1년 전에 비해 더 “행동하게 된 것 같다”며 자신 있게 말하는 그가 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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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프카 2006/01/19 [18:55] 수정 | 삭제
  • 사진에서 맨 왼쪽에 계신 분인가보네요. 열심히 찾았습니다. ^^
    인터뷰가 공감이 가네요. 제 현실은 아니지만요..
    광대꾼의 매력을 보고 갑니다. ^^
  • elle 2006/01/19 [00:59] 수정 | 삭제
  • 김수아님처럼 사는 분들은 나날이 몸은 더 가벼워지고 생각은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말이죠.
    기왕이면 작품 목록도 열거해주셨으면 좋았겠는데, 일다는 그런 거 잘 안 하더군요. (일다의 컨셉을 잘 이해합니다만 연극팬으로서는 조금 섭섭해요~)
  • 눈빛 2006/01/17 [19:14] 수정 | 삭제
  • 그러나 때로는 관객은 그 이상을 원하기도 합니다. 무대 밖의 배우를 한 개인으로 알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죠. ^^ 꼭 팬이라서가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친구로서나, 일 개인으로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는 판타지같은 게 있기도 하는 것 같아요...
    광대, 꾼, 이라는 이름이 연극배우들을 더 배우다운?? 느낌이 들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남과는 다르고, 많은 사람들을 관객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화려하기도 하고,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일상을 뒤에 배경처럼 느껴졌어요.
    김수아씨는 조금 안정적인?? 궤도로 인정받은 배우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전국공연도 하시고요. 좋은 배우로써, 제가 독자가 아닌 관객이 되어서 무대에서 만난다면 싸인받으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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