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모교육이 반공교육?

‘부모연수’란 이름의 강의를 듣고

박은진 | 기사입력 2006/07/05 [02:16]

[기고] 부모교육이 반공교육?

‘부모연수’란 이름의 강의를 듣고

박은진 | 입력 : 2006/07/05 [02:16]
저는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딸 아이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선 저학년 반의 경우, 주말에 학부모가 나와 청소를 담당합니다. 학기 초에 몇몇 어머니들이 연락을 해서 아이들이 어리니까 청소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요청을 해왔습니다. 제 경우는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은 터라 일손이 필요하면 돕겠다고 했습니다. 강제적인 것은 아니고, 지난 학기엔 매 주 학교에 갔지만 이번엔 한 달에 한 번 꼴로 갔지요.

그러다 어느 주말 아이 반을 청소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서 하는 말씀이, 시에서 공문이 왔는데 부모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습니다. 각 학급 당 2명 이상 학부모가 참석을 해야 한다면서, 우릴 향해 부탁하는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여쭈었더니 ‘부모교육’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평소에 양육을 하는 사람이 아이를 대하는 방법이나 서로 소통하는 방법,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서 해주어야 할 역할 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우리가 정규교육 과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받지 못한 교육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를 포함해 그 날 청소를 하고 있던 세 명의 어머니가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연수’가 이뤄지는 장소에 가보았더니, 초중등학교 학부모들이 다 모이는 자리였고 엄청난 규모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교육의 형식도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강의였고요.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는 모 대학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지자체에서 의례적으로 벌이는 행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강사가 하는 이야기 중에 뭐라도 건질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는데, 아이교육의 방향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더군요. 학창시절 조례 시간처럼 형식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더욱이 충격적이었던 건 강사가 이야기하는 도중 보수우익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며 실상은 ‘반공교육’을 했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가치관을 피력하면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간첩의 소행일 수 있다’는 둥 전혀 근거 없는 예를 들어가며 말을 잇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면서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더군요. 자리에 앉아 있는 수많은 학부모들이 아까운 시간을 내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화가 났습니다. 그 중엔 강사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분들도 있길래,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부모연수’ 프로그램은 강사 3명이 3시간 동안 하는 것으로 배정되어 있었지만, 처음 한 시간을 듣고 도저히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생각에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아마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 우리 세 사람밖에 없었을 겁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라도 행사 관계자에게 찍혀서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니까요.

지자체와 학교가 연계되어서 진행하는 학부모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사실상 각 학교에서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은 채 학부모들 머리 수를 세어 차출하는 방식으로 ‘동원’을 한데다가, 실제로 아이교육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엉터리 강의를 듣게 만들다니, 얼마나 학부모들을 무시했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아마 자리에 앉아 있던 학부모들 중 누구 한 사람을 불러 강단에 세워도 자녀교육의 방향에 대해 그보다는 나은 강의를 했을 겁니다.

게다가 근거도 없이 반공정신을 내세운 극우적인 가치관을 설파하기에 급급한 강의를 들으며 우롱 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학부모라고 해도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여성인데, 부모연수란 이름으로 이렇게 저급한 내용의 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그만큼 여성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처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배우고 학습하기를 원합니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 양육자로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경험으로부터 우러난 교육을 제공 받기를 바라게 되고, 영재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돕고 아이와 소통하며 스스로도 성숙해지는 길을 배워나가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을 기존의 구태의연한 사람들이 구태의연한 체계 속에서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어떻게 짓밟고 있는지 보여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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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리 2006/07/05 [17:28] 수정 | 삭제
  • 글을 읽으니 답답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네요.

    한 가지라도, 한 사람이라도, 문제 제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느 지자체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홈페이지에 글이라도 올리는 게 어떨지요.

    물론 학부모 입장에서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다른 분들과 함께 정중하게 공문을 보내거나 게시물을 쓰면 어떨까 싶네요.
  • Anna 2006/07/05 [14:10] 수정 | 삭제
  • 학부모란 이름으로 무시당하는 일들, 고개 숙여야 하는 일들 있는 것이 화가 납니다.
    저런 소리 해대는 강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다닐지 생각해도 끔찍하고요.
    우리나라 교육행정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어요.
  • ㅉㅉ 2006/07/05 [08:21] 수정 | 삭제
  • 국가라는데가 참 할일도 디게 없구나..
  • 2006/07/05 [06:12] 수정 | 삭제
  • 학교에선 별 일이 다 일어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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