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찾아나선 미국의 흑인여성문학

조라 닐 허스튼과 토니 모리슨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6/07/11 [19:04]

자신을 찾아나선 미국의 흑인여성문학

조라 닐 허스튼과 토니 모리슨

김윤은미 | 입력 : 2006/07/11 [19:04]
미국의 흑인, 그 가운데서도 여성의 이미지는 19세기까지 몇 가지로 고착되어 왔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성차별, 가족부양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또한 백인남성집단에 의해 성적 대상으로 비춰져 왔다. 그래서 흑인여성과 백인남성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은, 흑인여성에 대해 가부장적 지배를 하고 있는 흑인남성의 문제와, 흑인여성과 선뜻 연대할 수 없는 백인여성의 문제까지 결합하여 유난히 날카롭고 예민한 갈등을 부르곤 한다.

하지만 차별과 생존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미지가 흑인여성 이미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미국의 흑인여성들은 스스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으리라는 점을 예견할 수 있다. 미국의 흑인여성문학은, 차별 받는 ‘타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자 하는 커다란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들과 잎이 뻗어나간, 풍성한 숲인 것이다.

조라 닐 허스튼과 <그들의 눈은 신을…>

조라 닐 허스튼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1970년대에 새롭게 발굴되기 시작한 미국의 흑인여성문학의 선두로 꼽히는 소설이다. 허스튼은 1920년대 뉴욕의 할렘을 중심으로 생겨난 문화운동 ‘할렘 르네상스’의 구성원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에는 흑인공동체가 생겨났다. 이들은 ‘새로운 흑인’(New Negro)을 표방하면서, 자신들 또한 백인 못지않은 문화적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어 흑인이라는 인종에 자부심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에게는 대안으로 내세울 만한 흑인의 이미지가 부재했다. 아프리카 전통문화는 미국으로 거의 전해지지 못했고, 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규정된 ‘타자’로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흑인’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수용하는가 하면, 다른 작가들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물질주의적 흑인’ 이미지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허스튼은 흑인의 민속전통이 남아있었던 남부 시골을 배경으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를 썼다. 허스튼이 ‘할렘 르네상스’ 구성원인데다가 인류학자였던 만큼, 이 소설은 언뜻 보기에도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주인공 제니는 친구 피비에게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흑인들의 구전 전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니가 속한 흑인공동체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 되면 마을의 한 장소에 모여, 말장난에 가까울 정도로 하릴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고된 하루의 피로를 푼다. 그런데 허스튼이 의도한 바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제니는 흑인들의 전통 속에서 제외된다. 제니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 나선,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제니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부단히 변화한다. 첫 결혼은 할머니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머니 내니는 자신에 이어 딸마저 강간당하는 참혹한 사건을 겪고, 죽기 전에 손녀 제니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제니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으며 이를 버리지 않는다. 첫 남편이 제니를 시종처럼 여기면서 학대하자, 제니는 그를 떠나 백인처럼 자만심이 대단한 남자 조와 결혼한다. 조는 이튼빌이라는 마을에 정착해 마을을 개혁하고 시장이 된다. 그는 제니를 부속품으로 간주하고,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통제한다. 급기야 제니는 조에게 대든다. 조가 죽은 뒤 자신의 사랑에 대한 ‘로망’을 실현시켜줄,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남자 티 케이크와 결혼하게 된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작가가 의도한 바와, 작품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주제의식이 갈라진 인상이 강하다. 허스튼은 분명 흑인공동체의 매력을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주인공 제니가 세 명의 남성을 통해 얼마나 주체적인 힘을 기르게 되는가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 오히려 흑인공동체는 제니를 비난하고 야유를 퍼붓는다. 즉 그들은 제니에게 남편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하의 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뒤, 그 남자까지 죽인 ‘악녀’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다.

토니 모리슨과 <술라>

<그들의 눈은…>의 제니는 현재의 관점으로 볼 때 상당히 단순하고 자기긍정적인 인물이다. 그 단순함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복잡함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심을 자아낸다. 1970년대 이후 다수 발표된 흑인여성문학들은 흑인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복잡함을 면면히 파헤치는 주도 면밀함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토니 모리슨이다. <술라>는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타자가 아니라 오롯이 그 자신으로 서기 위한 여성의 모험을 담고 있으되 그 모험이 결코 자기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없음을 암시한다.

<술라>는 1919년 흑인들이 살고 있는 언덕마을에서 시작된다. 술라와 넬은 친한 여자친구들로, 둘 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상태다. 넬은 정숙함을 강조하는 어머니 헬렌 아래서 엄격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정작 헬렌은 열차의 백인전용칸에 실수로 올랐다가 차장에게 모욕을 피하기 위해 비굴하게 군다. 넬은 그런 어머니를 경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남자 주드와 결혼하여 정숙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술라는 넬과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라난다. 할머니 에마는 한쪽 다리를 스스로 잘라 보험금을 받아내고, 아들이 변을 보지 못하자 항문에 직접 손을 집어넣어 아들을 구할 정도로 집착적이고 강한 인물이다. 어머니 한나는 마을의 그 어떤 남자와도 자유분방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 술라는 할머니가 두렵고 어머니가 싫다. 그러나 술라에게는 본받을 인물이 없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 뿐이다. 그 결과 술라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술라와 넬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게 된 계기는, 이들이 어린 소년을 빙빙 돌리다가 호수에 빠트려 죽여 버린 사건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술라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넬 또한 당황한 술라에 비해 침착함을 유지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 같은 도덕적 무감은 특히 술라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10년 동안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온 술라는 정신이 멀쩡한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수많은 남성들과 단 한 번의 관계만을 가지면서 깊은 관계를 회피한다. ‘자아도, 초자아도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술라는, 급기야 친구 넬의 남편 주드와 관계를 맺어서 넬의 가정을 파괴한다.

<술라>는 억압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중심적인 상태를 선명하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같은 자기중심성은, 술라와 넬만의 문제가 아니라 흑인공동체, 나아가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술라>의 처음 등장인물은 1차대전에 참전했다, 옆에서 뛰어가던 병사가 머리가 날라간 채 몸만 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을 거쳐 마을로 돌아오는 쉐드렉이다. 그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쉐드렉은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 자살일’을 만들어 매년 행진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거칠고 폭압적인 시대적 분위기가 그를 통해 제시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갑작스레 술라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힌 넬은 “우린 둘 다 소녀였지.”라고 중얼거리며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울음을 터트린다. ‘타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의 위치가 지속되는 한 완성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술라와 넬에게 어떤 도덕적인 책임을 묻기보다는, 그들이 지나온 과정이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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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선 2006/07/13 [10:33] 수정 | 삭제
  • 미국흑인여성의 이야기라지만 현재 우리에게도 겹쳐지는 이야기라, 남 얘기가 아니네요. 한번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텍스트들을 전해주는 기사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