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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음은 이해한다?
겹겹이 쌓인 편견의 벽 허물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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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으로부터 수업 같은 걸 들은 건 아니고, 어떤 행사를 통해서 알게 된 분입니다. 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찾아 뵙게 되고, 보통 선생님과 제자라기보다는 나이 차도 크게 안 나고 해서 친구에 가깝게 지내왔습니다.

가족들이나 제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보다는 그 선생님과 말이 잘 통해서 참 좋아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제가 살면서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인간관계에서 치이는 것에 대해서도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따뜻하게 잘 들어주셨습니다. 저도 그 선생님의 얘기를 많이 듣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드리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그 선생님이 저한테 남자친구 안 사귀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친구 사귀어 본 적이 없는지 물었을 때 제가 없다고 하니까, 젊을 때 연애를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저와 연락을 할 때마다 남자친구 얘기를 자꾸만 꺼내셨습니다.

그 선생님과 참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 나올 때마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이야기하지 않고 피한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선생님은 마음이 넓고 사람들에 대해 이해를 많이 해주는 분이라서, 어쩌면 동성애에 대해서도 별로 편견이 없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레즈비언 친구 한 명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제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 그 선생님을 계속 만나는 게 답답해질 거고, 나중엔 안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라고 하더라도 저한테 불이익을 줄 위치에 있지는 않으니까 모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선생님에게 제가 동성애자라고 얘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번에 연락을 했을 때 또 그 선생님이 연애 얘기를 하시길래, 조심스럽게 저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조용해졌지만, 선생님의 반응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놀라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더욱 친절하게 ‘이해할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선생님도 동성의 상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제 감정을 잘 안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선생님은 결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네 마음은 여자를 사랑하겠지만, 몸은 남자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 다음 말부터는 귀에 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선생님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귓전에 그 선생님이 한 얘기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친구에게 그 얘길 전해줬더니, 그렇게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겠다면서 화를 냈습니다. 자기가 동성애를 이해 못하면 못한다고 할 것이지, 뭘 아는 척을 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친구는 저에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기운 내라고 했지만, 저는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습니다. 그 선생님이 밉거나 배신감이 느껴지기보다는 그냥 그 말 자체가 저를 속상하게 만들고 기운 빠지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선생님을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예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그 친구를 통해서 레즈비언 커뮤니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거기에 가서 제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저에게 몸은 남자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는 얘길 털어놓았더니 사람들 반응이 각각이었습니다. 엽기적인 호모포비아라는 말도 하고, 교사라서 예언이라도 하듯 말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에 대해서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얘기를 듣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친한 사람들도 아닌데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약간 후회도 되었습니다. 모임이 다 끝날 무렵에 두세 사람 정도만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있던 사람이 저에게 와서, 아까 그 선생님 얘기에 대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은 여자를 사랑하지만 몸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몸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역시 가능한 일 아니겠냐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그 사람 얘기는 사람들은 다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마음은 여자를 사랑하면서 몸은 남자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나요? 라고 말입니다. 만약 선생님이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한다면, 그럼 왜 선생님은 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동성애자란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나는 마음도 몸도 여자를 사랑한다’고 확실하게 얘기해주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화를 낼 필요도 없고, 울 필요도 없고, 겁을 먹을 필요도 없으니까 선생님과 예전처럼 대화하듯이 말을 해보라고 충고해줬습니다. 화를 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예, 선생님과의 관계가 예전처럼 편하고 좋은 관계로 계속 이어지기는 어려울 거라는 걸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선생님의 얘길 듣고 속상해하는 게 아니라, 저도 저의 생각을 선생님에게 얘기하고 제 얘기를 존중해달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화 내지 말고, 겁 먹지 말고, 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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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05 [13:06]  최종편집: ⓒ 일다
 
동감 06/09/05 [20:47] 수정 삭제  
  정말 답답한 선생님이네요.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만요.
커밍을 하게 되면 생각지도 못했던 뜨악한 반응들을 보게 되죠.
운 좋으면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열에 하나인 것 같구요.
그래도 할 말은 다 해야 하는데 기가 죽어서 암말도 못하게 되고.
그런 게 스트레스가 쌓여서 성격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용감하게 기 죽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잘 안되요.
bana 06/09/06 [04:14] 수정 삭제  
  글 읽으면서 안타까웠지만, 님은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필릴리 06/09/07 [15:36] 수정 삭제  
 
사람이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얘긴데
그건 비극 아닌가요?
:^) 06/09/09 [16:59] 수정 삭제  
  왠지 슬프네요.
여전히 순환되고 강요되는 이성애 정상주의...
겉모습만이라도 정상을 흉내내라는 건가요.
그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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