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미아 현대백화점 옆의 허름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구로 부근의 학원을 전전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사람들이 “명문”이라고 부르는 학교에 들어가면 명문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해, 비싼 학교에 가 부모님 등골을 빼먹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중1때까지 간직했던 ‘산타’에 대한 믿음처럼 오랫동안 그 말을 믿으며 붙들고 있었던 건,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그럴싸한 분위기에 도취돼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문학교 우수학생으로 길들여지다 중학교 땐 학교에서 자고, 학원 가서 눈이 빠지도록 공부하다, 집에 오면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키보드를 두들기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종종 자다가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하루 이틀 빠져도 학교에선 생활기록부를 무마해주기 위해 알아서 애써주었다. 내 등수에 걸맞은 혜택으로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는 쓸데 없는 농담이나 주고 받고,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노래방을 다녔다. 고민을 나누고 다독이는 친구가 몇 명 있었으나, 나보다 좋은 성적을 내는 친구가 있으면 어쩐지 께름칙했다. 고등학교 때는 비교적 조용하게 죽어지냈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일이 피곤하다고 생각했고,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예쁨을 받게 되면 친하던 친구들도 곧바로 나를 멀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익히 몸으로 깨달아 알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서로 예쁨을 받고 싶어했지만, 대놓고 그런 편애를 받는 것은 싫어했으니까.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지는 않지만, 모의고사가 끝나고 나면 복도에 붙는 이름의 위치를 두고 항상 암묵적인 경쟁이 이뤄졌다. 쉬는 시간에 소설을 읽으면, 아까운 시간에 그런 책이나 읽고 앉아 있는 것이 건방져 죽겠다는 듯한 주위 시선이 따가워서, 곧바로 소설책을 덮고 소심한 손짓으로 서랍을 더듬으며 단어장을 찾았다.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언제나 오가면서 서로의 책을 들춰보고 “이 출판사 것은 아직 안 풀어봤는데, 어때?”라는 식으로 항상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얼마나 더 많이 풀고 있는지 체크했다. 시험 때마다 싸늘해지기는 했어도, 성냥갑만한 공간 속에서 사고하며 빽빽하게 짜인 일상을 견디느라 다들 서로 ‘친구’라는 의식은 갖고 있었다. 입시와 대학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서로 측은하게 여기며 등을 다독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만고만한 동료의식은 거기까지, 우린 곧 냉정한 수험생으로 돌아왔다. 수능이 끝나면 언제나 어떤 선배가 일등을 먹었는데 그 선배가 그럴 줄 몰랐다네, 어떤 선배는 재수를 하게 생겼는데 어쩐지 성격도 별로였다네, 하는 말들이 후배들 사이에서 오갔다. 선생님들은 우수학생과 관련한 신화를 만들어 설파하시기에 바빴다. “그 선배는 너희 때 몸이 부푼 것처럼 뚱뚱했는데 대학 가더니 사람이 되어서 왔다, 그러니 너희도 참고 견뎌라. 성적 안 좋으면 좋은 선배도 못 된다.” 가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다른 학교 애들이 밑에 기본적으로 깔아주니 감사하라.” 모두가 깔깔댔다. 그리고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서 명문고의 우수학생들로 거듭났다. 물론 나도, 잘 길들여졌다. 토마토 하나와 ‘동료의식’ 이렇듯 십 년 넘게 철저하게 경쟁에 길들여지고 그로 인해 그럴싸한 관심을 받으며 자란 내게, 잘난 또래친구들은 언제나 시기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만나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에게 가장 힘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매우 건강하다고 여겨왔던) 동료의식에 대한 것이다. 상식이 풍부하거나 어떤 분야에 해박한 친구들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되지?’ 하며 엄청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러다 주변의 어떤 친구를 보면서, 나의 이런 생각이 애초에 잘못 길들여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 친구는 창의적인 또래친구들을 보면 ‘쟤랑 같이 어떤 일을 해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기업에서 하는 사회공헌 프로젝트의 하나로 미디어 소외 지역의 아이들을 찾아가 미디어교육을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엔 도시의 작은 공부방을 다녔는데, 한 번은 어르신들이 농사를 짓고 아이들은 간식으로 텃밭에서 수박을 따다 먹는 (나로서는 어느 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곳에 가게 됐다. 이 곳에서 우리의 프로젝트는 착착 진행되었는데, 그건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서로의 말을 경청해주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보통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나처럼 학부모든 학생이든 경쟁에 익숙해져 있어서, 자신이 큰 목소리를 내고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해 보이려 하기 십상이다. 그 과정에서 친구가 나보다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조마조마하거나 분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몇 안 되는 깨달음의 순간 중 하나는, 바로 그 아이들과 간식을 먹게 되었을 때였다. 잔디 위에서 아이들과 영화촬영을 하다가, 잠깐 쉬자는 말에 마을 총무님이 토마토 몇 개와 먹음직한 수박 몇 통을 가지고 오셨다. 그 마을에서 토마토 재배를 많이 하는지, 부쩍 토마토 먹을 기회가 많았다. 다음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토마토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과도가 없어서 대여섯 명 되는 아이들이 함께 토마토 하나를 먹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가위바위보 할까? 누가 먹을래?” 나는 토마토를 집고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물었다. 아이들이 만드는 영화에서 주인공 역으로 맹 연기를 펼치던 남자아이가 더 당연하다는 듯이 “선생님 괜찮아요. 같이 한 입씩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고는 토마토를 가져갔다. 내 손을 떠난 토마토가 아이들 사이를 빙빙 돌다 마침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토마토를 한 입씩 베어먹은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가위바위보로 한 명에게 몰아주기에 익숙해지고, 1등을 하는 아이가 반장을 도맡아 하고, 상을 받은 한 명이 언제나 제일 먼저 선생님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살아왔던 내 꼬맹이 시절이 스쳐갔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서울에 와서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했다. “토마토가 하나만 있으면 어떡할까?”하는 나의 질문에 친구들은 “대여섯 명이나 되면 조금밖에 못 먹을 텐데, 그냥 몰아주는 게 낫지 않아?”라든가 “칼로 똑같이 나눠야지. 그래야 서로 안 싸우지”라고 답했다. 그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 다들 “그게 가능해?”라며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애들이라고 마냥 싸울 줄만 알겠는가, 사실 우리보다 성숙한 소년소녀들이었다. 만화가가 꿈이라는 한 언니는, 만화계가 작아서 어떤 작가는 문하생이 자기보다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해 잘 키워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끼리 따로 만화작업실을 꾸리는 일이 요새 더 많다고 한다. 대학에 와서는 자신의 강의에 토를 다는 학생을 분하게 생각하며 마땅찮은 학점을 주는 교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는다. 대학원생을 라이벌로 의식하면서 남의 글에 자기 이름으로 버젓이 책을 내는 교수 이야기도 들었다. 몇 안 되는 교수직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경쟁을 견디며 그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동료의식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승자독식은 어쩔 수 없으니 강대국에 붙어야 산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땡땡이나 치면서 친구들이랑 좀더 놀 걸, 이제 와서 나의 지난 학창시절이 허탈해 진다. ‘친구’라면 서로의 성장을 격려해주고, 붙잡아 주고, 고민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마음 속에 어떤 장애가 있어서 스스로 벽을 쌓고 경계를 만들어 혼자 열등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후회가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에 나가서 생활할수록,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이들과 친구하기 힘들어질 텐데, 그 소중한 시간을 삐뚤어진 생각으로 ‘친구는 필요 없다’며 날린 것 같아서 말이다. 어차피 혼자인 세상이라 일단 나부터 잘나고 봐야 한다는 생각과, 혼자인 세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충실하고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 두 생각의 차이는 깻잎 한 장이었는데, 그걸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은 정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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