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우먼리브 선구자, 다나카 미츠의 삶과 글

여성역할을 거부하고 자아를 찾아 나서다

조이승미 | 기사입력 2006/11/29 [06:14]

日우먼리브 선구자, 다나카 미츠의 삶과 글

여성역할을 거부하고 자아를 찾아 나서다

조이승미 | 입력 : 2006/11/29 [06:14]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억압을 오른발로 차버리고, ‘자립한 여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억압도 왼발로 차버리는 것이 여성해방입니다. 교양이 없이 저급하고, 뭐 대충 대충하고, 농담을 좋아하고, 신랄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나는 ‘우먼 리브’ 운동을 했습니다.” (다나카 미츠 <생명의 이미지 트레이닝> 1996년 현대신서>

남성들의 이분법에 의해 ‘분단된 여성’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 일본 사회는 고도의 경제성장 이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분출되고 다양한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대학 내 학생운동은 학문과 사상의 의의와 인간의 삶의 방식을 물었다. 일본의 여성해방운동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1970년 10월 21일 국제반전의 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여성들만의 반전(베트남전)데모를 벌였다. 이 날 ‘그룹 싸우는 여성’의 멤버인 다나카 미츠(1943년~ 도쿄 출생)는 손으로 직접 쓴 <변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언문을 뿌렸다. 이것이 일본의 여성해방운동 ‘우먼 리브’(Women Liberation, 여성해방)의 기념비적 효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격렬했던 학생운동에서 여학생들은, 기동대와 싸우고 대학으로 돌아온 남학생들을 보살피고 혁명가를 자칭하는 남성들의 활동자금을 모으며 가사와 육아, 세탁을 하는 등 성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성의 일상의 모든 부분은 암묵적인 폭력 하에 강요당하고 있는 것 아니냐” 라고 다나카 미츠는 물었다.

그는 <변소로부터의 해방>에서 ‘변소’(공중변소)라는 용어가 성 경험이 많은 여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신좌익 운동을 하는 남학생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는 은어이며,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위안부”를 일컬었던 일본 황군의 군대 용어였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다나카 미츠가 <변소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여성을 ‘주부’와 ‘창부’로 나누고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과 성관계는 맺지만 아내나 연인으로 삼을 수는 없는 여성이라는 식으로 철저히 분리하는 남성들의 이분법으로부터 여성들이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의해 “황폐한 들”처럼 분단된 여성의 ‘전체성’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패러다임 바꿔

<변소로부터의 해방>이 일으킨 반향은 컸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인 1971년 8월 나가노에서는 ‘우먼 리브’ 세미나가 열리고, 1972년 5월 첫 ‘우먼 리브’ 대회가 열렸다. 다나카 미츠는 전력을 다해 1972년 가을 신주쿠에 ‘우먼 리브 센터’를 개설했다. 우먼 리브 센터에선 1972년 장애 태아의 선별적 중절을 가능케 한 ‘우생보호법’ 개악에 반대해 장애인해방운동과 함께 투쟁을 벌였다.

‘우먼 리브’ 운동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우먼 리브’ 운동은 “전국 못생긴 여자들의 연맹”, “인기 없는 여자들의 히스테리”라는 등 온갖 중상모략과 조롱을 겪어야 했다.

여성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우먼 리브’ 운동에 대해 여성해방운동의 패러다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여 여성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일본 근대 여성해방운동에서 진일보했다는 것이다. ‘우먼 리브’ 운동은 남성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산업사회의 가치에 가담하고, 베트남전쟁과 아시아 배타주의, 침략주의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우먼 리브’ 운동 전에는 주부연맹이나 어머니대회 여성들, 노동조합 여성부와 사회주의운동 안의 여성들, 즉 남성들로부터 그 존재를 허락 받은 여성이거나 ‘여성역할’을 부여 받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했다면, ‘우먼 리브’ 운동은 그 역할의 폐쇄성을 뛰어넘고 장애인을 비롯한 지역 소수그룹들과 다양하고 수평적으로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그런데 ‘우먼 리브’ 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하던 다나카 미츠는 1975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여성의해 세계회의를 계기로 멕시코로 훌쩍 떠났고 4년 후 돌아왔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돌아온 그는 한방침구학교를 다니다 1982년 자신의 클리닉 “여성과 어린이의 몸을 기르는 레라하루세”를 열어 동양의학 강사로 활약하게 된다.

돌연 ‘우먼 리브’ 일선에서 자취를 감춘 듯한 다나카 미츠의 행보에 의문을 보내는 여성운동진영과 여성학계에 대해, 1983년 자신의 멕시코 생활을 기록한 <어디에 있어도 우먼 리브 활동가>라는 책 제목으로 답한 적이 있지만, 사람들은 왜 그가 운동의 장을 떠났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 의문은 2004년 일본 여성학대회에서 가까스로 풀렸다.

대회에 참가한 다나카 미츠는 “인간의 ‘솔직한 감각’에 대한 고민이 곧 몸과 생명에 대한 흥미로 이어졌고 그래서 침구사가 되었다. 그동안 ‘우먼 리브’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선두에 서서 길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고자 했다.”라고 운을 띄운 뒤, “내 삶의 기준은 이중적 기준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 발표한 논문 <자신을 묶는 페미니즘을 벗어나서>의 한 대목에서, 우리는 결국 그가 선두 운동가인 자신 내부까지도 분열시켜온 남성들의 이중기준을 솔직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이중 기준에서 벗어나고자 살아왔던 점과, 이 또한 그가 생각하는 여성해방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004년 일본여성학 대회에서 다나카 미츠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나이를 속여 말하고 싶기도 하다가 ‘결혼 따위가 뭔데’ 라고 생각하는 자신도 있다. 그 어느 쪽도 자신이며, 이 양면이 다 있어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먼 리브’ 운동 선두에 서있을 때는 ‘강한 여자’를 계속 연출해가고 있었고 자신이 아닐 때도 있었다. 당시 ‘우먼 리브’ 운동을 끌어간 것은 자신의 가정에서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하고, 밖에서는 운동을 하는 그런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분열시키는 이중기준에 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 운동 일선에서 물러난 이유다.”

사실, 1996년 발간된 <생명의 이미지 트레이닝>에서도 이미 그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솔직한 ‘나, 자신’이 되고 싶어서 여성해방운동을 해왔고, 계속하고 있노라고. 여성해방운동은 이래야 한다, 여성운동가는 저래야 한다는 정석이 어디 있겠는가. 말하자면 그는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자신의 외면과 내면에 부여한 여성 역할에 대해, 자신의 삶의 행적을 통해 거부하는 것으로 ‘우먼 리브’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최근 다나카 미츠는 <자신이 치료하는 냉증>이라는 책을 출판하며, 몸과 생명에 대한 생각을 넓히고 있다. 그는 살아있는 ‘우먼 리브’의 육성이며, 이 육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페미니즘의 행운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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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kxlfek 2006/11/30 [12:28] 수정 | 삭제
  • 다나카 미츠 이름은 익숙한데, 책을 한 권 본 기억이 있어요.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고만 알았는데, 운동가로서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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