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노조수연 | 기사입력 2007/05/15 [01:17]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노조수연 | 입력 : 2007/05/15 [01:17]
아일랜드의 험난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접하기 전에는 심호흡을 해두는 게 일종의 습관이 될 것 같다. 다사다난한 역사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아일랜드의 경우 깊은 갈등과 폭력 분쟁이 수백 년에 걸쳐 내려왔고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끝 모를 심각성이 더해진다.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닐 조던 감독의 전작 <크라잉 게임>(1992)도 아일랜드의 복잡다단한 정치사 밑에 철저히 짓눌린 개인들의 삶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최고의 ‘반전영화’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물론 반전(反戰)이 아니라 반전(反轉)이었다. 그럼 그렇지.) 개인이 처한 사회의 정치적 현실이 어떻게 그들의 미시사(microstoria)에 파고드는가, 사적인 삶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구조에 의해 어떻게 희생되고 조직되는가를 비극성만큼이나 잘 다룬 영화다.

<크라잉 게임>이 개인의 층위에서 바라본 현대 아일랜드의 비극이라면, 역시 같은 감독의 영화 <마이클 콜린스>(1996)는 좀더 직접적이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대영제국’으로 불리던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해 반란과 혁명으로 저항하던 아일랜드의 피맺힌 역사와, 그 전쟁을 이끌던 마이클 콜린스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전기영화다.

이외에도 짐 쉐리단 감독의 <아버지의 이름으로>(1994),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2002),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같은 영화들이 아일랜드의 굴곡진 현대사와 아일랜드인들의 모진 삶을 그려내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킬리안 머피는 그 이전 해인 2005년 <플루토에서 아침을>에 경쾌하게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앞선 영화의 무거운 주제에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건, 이 영화엔 별로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닐 조던 감독과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대기를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느냐고? 일단 영화 포스터의 꽃분홍색과 여장한 킬리언 머피의 요염한 눈매를 믿어보자.

이 영화는 아일랜드에서 피로 얼룩진 시기, 캐릭터들의 사회적, 성적, 정치적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어느 마을, 주인공 키튼(킬리언 머피)은 갓난아기일 때 성당 앞에 버려진다. 아기를 발견한 버나드 신부(리암 니슨)은 그를 교구 내 어느 집에 입양 보내고, 이곳에서 그는 엄격하게 키워진다.

그러나 키튼은 양어머니의 구박에 기죽지 않은 채 누이의 옷을 훔쳐 입거나 하면서 아름다운 여성이 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친어머니가 여배우 밋지 게이너를 닮았다는 것과, 그녀가 대도시인 ‘런던에 의해 삼켜졌다는 것’ 등 단편적이고 수상한 정보 몇 가지를 가지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엄마 찾아 삼만 리를 헤매는 도중 밴드의 보컬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클럽에서 공연하는 마술사와 관계를 맺기도 하며, 키튼은 험난한 타향살이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끔찍했던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가난하고, 차별 받고, 위험에 처하지만 ‘그것도 인생’이라고 받아들이는 듯 초연해 보인다. 오랫동안 피로 얼룩진 아일랜드에서도,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것처럼.

우여곡절 끝에 친모와 친부가 누군지 알게 되지만 거기에는 감동적인 상봉이나 해피엔딩 이후의 삶은 없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 키튼이 그리던 이미지인 유령숙녀는 사라졌지만, 만남 이전에도 이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부모의 존재와 관계없이 키튼에게는 그만의 인생이 있고, 그걸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역시,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가장하지 않은 경쾌함, 순진 무지해 보이는 그의 행동방식,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키튼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낯선 종류의 슬픔을 느낀다. 현실 정치, 성 정체성, 종교 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 부정하는 듯한 모습에서 오히려 거기에 더 얽매여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확실히 묘한 일이다.

아일랜드가 배경이지만 거기에서 오는 어떤 전형성을 가볍게 그리려고 하면 할수록, 키튼이 그 집단 안의 사회성을 공유하지 않은 채 천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수록, 그 모든 가벼움과 무지는 절대로 현실의 영향력에서 떠날 수 없다고 더욱 잔인하게 각인된다. 진실로 순진했던 친구가 테러범의 폭탄에 날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키튼은 마치 명왕성에서 아침식사를 하다 온 사람처럼 이 세상에 낯설어 보이지만, 적어도 그가 자연스럽게 몇몇의 지구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보면 아일랜드와 세계의 평화가 판타지만은 아닐 거라 믿고 싶어진다. 웃음과 태연함이 위태로운 현실을 더욱 아프게 보여주더라도, 살아온 시간들이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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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U 2007/06/21 [18:12] 수정 | 삭제
  • 무심코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느꼈습니다. 스포일이 포함되어 있었네요.
    기사 제목에 먼저 경고글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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