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을 지지해주는 사람들
“너 자신을 꼭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
레고 | 입력 : 2007/10/26 [01:51]
2006년 초 미국에서 겪은 일이다. 당시 유학 중이던 나는 이모와 이모의 아이와 함께 같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마트에 가는데, 게이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모가 동성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물어 보았다.
“이모, 저기 저 사람들 게이커플 같지 않아?”
그런데 이모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응. 게이커플이네. 너는 동성애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모 주변에도 레즈비언, 게이 커플들이 있는데 이성애자 커플보다 더 서로에게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거 같더라.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정말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데. 뭐 그 속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생각보다 호의적인 대답에 나는 이때가 기회지 싶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고민했다. 나는 당연히 이모의 말에 동의한다고, 우리 나라에도 레즈비언이나 게이 인권단체들이 있다고 했다.
내가 너무 흥분해서 말한 걸까? 이모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너는 어때? 네 성 정체성은 무엇이니?”라고.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대답해버렸다. “응. 난 레즈비언이야.”
조금 뜸을 들인 내 대답에 이모는 “공항에 내리는 순간, 너 딱 그런 줄 알았어”하며 웃으셨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모 딴에는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네 정체성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야. 그건 절대로 나쁜 게 아니니까, 이 사회가 너를 억압해도 거기에 지지 마. 이 사회에 지면 넌 너 자신한테 지는 거야. 너 자신을 꼭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이모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오히려 이모가 나에게 먼저 한 셈이다. 그러면서 이모는 내가 레즈비언인 것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도 엄마만 대충 눈치 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모는 앞으로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거나 대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 있다면 자신이 많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모 주위의 레즈비언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나는 이모에게 커밍아웃 하기 전까지 가족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말하지 않으려 했다. ‘동성애를 이해하지만 내 가족이 동성애자인 것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모에게 한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한 첫 커밍아웃이었는데, 내가 동성애에 대해 해주고 싶었던 말들이 이모의 입에서 나오다니. 꽤나 성공적인 커밍아웃이라 생각했고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데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미국이나 서구에 있는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호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나라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총에 맞아 죽는 등 더 극심한 혐오범죄가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이모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은, 주위에서 동성애자들을 많이 보아 왔고, 동성애에 대한 여러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한국에서의 일들과 비교가 되었던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레즈비언의 ‘레’자만 꺼내도 여기저기 수군거리던 사람들, ‘동성연애자’만 아니면 된다고 하던 엄마, 한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혐오 섞인 반응들 말이다.
나는 지금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살고 있다. 아직 이 사회에는 바꿔 나가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변화에 대한 의지는 지금도 나를 가만있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레즈비언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으며, 그 사람들에게 보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커밍아웃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할 일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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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gr 2007/10/26 [12:32] 수정 | 삭제
- 아자 2007/10/26 [10:41]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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