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기념 선물을 받다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
박상은 | 입력 : 2007/12/06 [22:09]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걸,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이상은의 노래 “삶은 여행” 중에서)
나를 열광케 하는 인생의 역할모델이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네 명이다. 오프라 윈프리, 이금희 아나운서, 한비야, 강금실. 우연찮게도 모두 여자이며, 모두 싱글이다. 어쩌면 내 결혼생활의 종말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에너지로 충만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줄 알았던 결혼
아직도 기억한다. 언니와 차를 마시다가 아무 이유 없이 불쑥 내뱉었던 말.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야.”
남자친구를 사귈 때 항상 기대고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맞춰주는 수동형이 아닌,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능동형 관계를 즐겼다. 결혼도 현명하게 선택하리라 결심하고, 몇 가지 발칙한 상상들을 결혼조건으로 내세웠다.
첫째,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을 것. 둘째,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줄 것. 셋째, 아이를 갖지 않을 것. 넷째, 가사분담을 철저히 할 것. 다섯째, 부모님을 모시고 살지 않을 것.
친구들은 그런 남자 없다고 못박았지만, 남편은 어찌 그리 자신의 생각과 똑같냐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yes”를 외쳤다. (나중엔 나와 결혼을 하려고 의지와 상관없이 한말이라 고백했지만.)
그렇게 결혼 준비가 시작되고 양가에 인사를 드리며 다닐 즈음, 시어머니의 호출전화에 나가보니 성형외과에 예약을 해놓으셨단다. 결혼식 전에 얼굴을 미리 고쳐 놓아야 한다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단 상담만 먼저 받아보겠다며 의사와 마주앉았다. 그리고 결정을 종용하시는 전화에,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핑계를 둘러버렸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땐 그것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훗날 그 일이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조차 내 얼굴에 관한 농담 섞인 인격적 모욕을 당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건 알지 못한 채.
한걸음도 더 내디딜 수 없게 됐을 때 멈춰서다
이혼이란 단어를 처음 떠올리게 된 것은 어느 명절날 오후. 시댁에서 음식을 하다가 자고 가라는 시아버님 말씀에,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 어느 건물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꺽꺽 데며 울던 그날부터였다.
패닉 상태에 빠져 지내던 나를 달래지도, 걱정하지도 않던 남편을 원망하진 않았다. 그들은 이미 끈끈한 혈연관계이지 않던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고 나서 돌아서자!’ 하고 결심했다. 혼수가 부족했다며 우리 부모님과 집안을 들먹일 때도, 장볼 때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훔쳐 나오는 도덕적 결함들을 목격할 때도, 게임중독에 빠진 남편을 볼 때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물론 남편과 싸우기도 많이 했고, 대화가 단절된 채로 지내기도 했었지만, 감당할 수 없을 힘든 상처와 시련 속에서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하자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듯 몇 년이 흐르자, 한걸음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나는 멈춰 섰다. 아이가 없으면 헤어지기 쉽다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 섞인 소리를 늘 들어왔지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는 이들에게 이혼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너무나 힘겨웠다.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에서도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리는 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렸던 내가 그들에게 정말 간절히 듣고 싶었던 건, 어쩌면 말이 아닌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하는 눈빛이나 토닥여주는 손길 같은 것들이었다.
엄마나 언니가 말없이 눈물만 흘렸던 것처럼 함께 울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참고 살아봐”, “애를 낳아보지 그래?” 하는 식의 반응은 또 다른 상처가 됐고 마음을 닫게 만들었다.
화사하게 맞이한 독립
나만의 공간을 갖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결혼 전 가족의 품을 떠나 혼자 생활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좋은 집 구하는 방법, 이삿짐 업체 고르는 나름의 노하우와 전문가 수준 이상의 도배, 페인트칠은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한 생활지침서’ 같은 것을 만들어도 될 정도다.
“한국 여자들이 제사니 명절이니 해서 시댁에 쏟아 부어야 하는 가사노동과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모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썼다면, 우리 나라는 벌써 선진국이 되었을지 몰라” 하고 농담하며 낄낄대던,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단짝인 친구에게 이혼기념 선물을 받았다.
분홍색 캐노피 침대. 어릴 때부터 늘 꿈꾸어 왔던, 하지만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공주풍 침대. 그에 걸맞게 집안을 온통 꽃무늬벽지와 레이스로 도배장식을 하고, 예쁜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자가용으로 구입하며 나의 새로운 독립을 화사하게 맞이했다. 때마침 추워진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기는 싫었다.
아직까지는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스치는 것 같이 쓰리고 아프다. ‘결혼’이라는 관습 속에서 퇴색되는 사랑을 보았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으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너무너무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고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다. 인생 계획을 다시 새롭게 세우며 홀로서기로 한 결정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운 마음도 앞선다.
하지만 감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시댁식구 모두를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결혼이라는 것, 씨족이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교환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결혼제도가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의 행복이 아닌 가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그것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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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2011/05/26 [16:45] 수정 | 삭제
- mbily 2009/07/17 [14:47] 수정 | 삭제
- 바람처럼 2008/02/23 [14:19] 수정 | 삭제
- 독자 2007/12/25 [01:43] 수정 | 삭제
- toi 2007/12/20 [23:21]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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