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三代) 여성들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독립을 지지하는 영화 <조지아 룰>

윤정은 | 기사입력 2008/01/25 [12:45]

삼대(三代) 여성들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독립을 지지하는 영화 <조지아 룰>

윤정은 | 입력 : 2008/01/25 [12:45]

독립은 모든 여성에게 중요한 화두이다. 일다에서 낸 책 <나, 독립한다> 출간과 더불어 앞으로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루는 ‘여성의 독립’ 이야기들을 만날 계획이다. <편집자주>


차도 몇 대 지나다니지 않는 산간오지 도로 위에서 두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냥 차에 타. 끝까지 걸어갈 수 없어.”
“난 엄마의 인생이 아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거칠게 콜라캔을 집어 던지는 레이첼(린제이 로한 역). 그녀 옆으로 바싹 붙어 ‘차에 타라’고 종용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머니 릴리(펠리시티 허프만 역)이다.

모녀간 대화에는 지독한 증오가 묻어있다. 레이첼이 “지금 내 맘 속에서 나가주면 좋겠어”라고 이성을 잃은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비싼 자동차를 발길질 할 태세로 나오자, 릴리가 탄 자동차는 흠집이 날까 무서워 꽁무니를 내빼고 만다.

뭔가 뒤틀려있는 삼대(三代)의 이야기

이야기는 거기, 길 위에서부터 시작한다. 독설을 퍼붓고 거칠게 행동하는 딸을 이기지 못해 길 위에 내버려두고 가버리는 어머니 릴리. 그녀는 곧장 자신의 어머니인 조지아(제인 폰다 역)의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조지아 앞에서 릴리는 여지없이 딸 레이첼과 비슷하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기는커녕 인사도 제대로 하는 둥 마는 둥,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을 남겨둔 자기 딸을 더 이상 양육하기 힘들어 어머니가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하곤 미안한 기색도 없이 친구를 만나러 떠나버린다. 심각하게 뭔가가 뒤틀려있고, 꼬여있는 것이 틀림없는 삼대(三代).

늦은 시간에 할머니 집을 찾아온 레이첼이 들어서자마자 “배 고프다”고 하지만, 조지아는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멀리서 찾아온 손녀는 밥을 얻어먹기는커녕 “우린 6시에 먹는다. 예외는 없어”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조지아의 룰(rule)’이다. 레이첼은 말로만 듣던 ‘어머니가 지긋지긋해하던 조지아의 룰’을 듣자마자 콧방귀를 뀐다. 고삐 풀린 망아지 레이첼과 엄격하기로 소문난 조지아의 동거가 시작됐다.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일해야 한다’는 조지아의 룰에 따라 레이첼은 다음날부터 수의사 사이먼의 동물병원에 나가 일해야 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동물병원에 가서 ‘일하지 않겠다’고 말을 할 심산으로 갔다가 사이먼을 보고는 그 자리에 눌러앉는다.

레이첼은 다른 남자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사이먼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미 12살 때부터 계부로부터 강간을 당했고, 계부의 성적인 행동이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느낀 적도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제 조지아, 릴리, 레이첼의 삶을 둘러싼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다. 레이첼과 어머니 릴리를 둘러싼 애증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왜 서로가 소통하기 힘들었는지.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대화 방식 속에는 오래 전부터 뭔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호하지 않는 가운데 방치된 아이가 터득한 생존방식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의 끊임없는 거짓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있었다. 레이첼은 사이먼에게 했던 얘기를 후회하며 곧 조지아에게 ‘거짓말’이었다고 말하지만, 조지아는 릴리를 불러들인다.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말하는 딸

릴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딸을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레이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 가지고 싶은 것이면 뭐든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제공하는 집과 자동차, 부유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분열하고 만다.

딸을 찾아와 몇 번이고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하는 릴리는 평정을 잃고, 끊었던 술에 다시 의존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남편이 찾아오면 어떤 칼로 죽여버릴까 작심에 작심을 하지만, 그건 그녀의 허세이다. 막상 남편이 찾아와서 ‘레이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하자 혼란스러워하고, ‘사랑한다’는 남편의 달콤한 말을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그녀는 이 남자가 제공하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 어머니 릴리를 레이첼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매일 술에 취해 살면서 생활력이라고는 없고, 돈 많은 남편이 먹여 살리지 않으면 홀로 설 수 없는 어머니를 알고 있다. 그래서 릴리 앞에서 레이첼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말한다.

멋진 빨간색 페라리를 타고 온 계부를 찾아가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주면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거래를 하는 레이첼의 모습은 사뭇 안타깝다. 거짓말쟁이 딸이 엄마를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론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함을 통해 얻는 것들

입만 떼면 거짓말을 하는 딸 레이첼을 다시 어머니 조지아에게 맡기고, 멋진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 집으로 떠나는 릴리. 이때 조지아는 룰(rule)을 발동한다. “엄마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릴리 또한 차 안에서 남편이 비싼 페라리와 딸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를 세우라”고 소리친다. 맨 처음 아이다호로 오는 도중 레이첼이 그녀의 차에서 내려 소리 질렀던 것처럼. “차를 세우라”고, “내리겠다”고. 그녀는 길 위에 내동댕이 쳐진다. 길 위엔 그녀밖에 없다. 잠시 후, 조지아와 레이첼이 탄 트럭이 그녀 앞에 도착한다.

갈등 뒤에 오는 화해라는 뻔한 구조, 행복한 엔딩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두 여자는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졌을 분노와 증오를 녹여내야만 했다. 두 여인이 포옹하는 장면 뒤로, 더 이상 번쩍거리는 고가의 자동차는 없다. 허름한 픽업트럭 위에 조지아가 두 사람의 화해를 지켜보고 있다. 릴리의 독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지아 룰>(게리 마샬 감독)은 개봉된 뒤 미국에선 평론가들이 일제히 혹평을 쏟아냈다. 무엇이 미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그러나 <조지아 룰>은 돈과 자동차, 술과 나약함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못했던 어머니가 뒤늦게 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찾는 과정을 잘 그린 영화다.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 그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진실을 인정하면서 두 여성은 곧바로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간에 남아있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한다. 이 영화는 두 여성의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독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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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e 2008/02/01 [19:58] 수정 | 삭제
  • 내용을 보면 뭔가 가슴이 많이 아파질까봐 겁도 나는데, 게리 마샬 감독 영화라고 하니까 밝게 그렸을 것 같네요.. 린지도 보고 싶고요..
  • 독자 2008/01/26 [21:24] 수정 | 삭제
  • 배우들의 포스가 이미 여성영화임을 말해주네요. ^^
  • 아뉘 2008/01/26 [10:45] 수정 | 삭제
  • 린지.. 펠리시티 허프만... 제인 폰다..
    다 좋아하는 배우들~
    보고 싶으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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