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소개하는 글들은 하나 같이 “충격적인 영상”,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장면”, “끔찍하도록 냉정한 리얼리즘”과 같은 표현들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 경험인지를 토로하고 있었다. 과연 다음 상영 회차의 입장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안색을 살피니, 모두의 얼굴에 하나 같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피로와 곤혹스러움의 표정이 담겨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불편하고 놀라게 만들었을까.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특징짓는 것은 영화적 서술기법을 거의 배제한 채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올 로케이션으로 인물들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건조한 시선과, 견딜 수 없어 고개 돌리고 싶은 장면마저 고집스레 응시하는 지독할 정도의 사실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이렇게 집요한 카메라의 눈이 뒤쫓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불법낙태시술을 받는 한 여성과 그녀를 돕는 친구의 악몽과도 같은 하루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여성’만의 문제로 남는 낙태의 경험
1987년 낙태 시술이 불법인 루마니아 사회주의 독재정권 하의 한 대학기숙사, 룸메이트인 가비타(로라 바질리우)와 오틸리아(안나마리아 마링카)는 여행이라도 떠날 준비를 하는 듯 칫솔과 비누, 모아둔 돈을 챙기느라 바쁘다.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걱정하고, 옆방 친구의 귀여운 고양이에 열광하고, 비누는 비듬이 생기지 않는 ‘럭스’로 사오라고 주문하는 그들의 모습은 스물을 갓 넘긴 그 또래 어떤 여대생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평범한 일상은 그들이 곧 겪게 될 ‘전혀 평범하지 않은 하루’의 순간들과 대조되며 이를 더욱 끔찍하고 괴로운 것으로 만들 뿐이다.
임신한지 이미 4개월 하고도 3주를 넘긴 가비타는 하루라도 빨리 시술을 받지 않으면 불법시술마저 거부당할 처지다. 그러나 호텔방을 잡는 일도, 불법시술자 베베를 만나러 가는 일도 혼자서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이다. 이런 그녀의 곁을 지키며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은 그녀의 가족도, 아이의 아버지도 아닌, 친구 오틸리아이다.
일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고도 천연덕스레 마지막 남은 담배를 피우는 철없는 친구 가비타를 위해 두려움과 공포, 죄의식 속에서도 그녀를 위해 돈을 빌리고, 호텔방을 잡고, 심지어는 돈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는 베베의 요청까지 거부하지 못하는 오틸리아의 모습은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오히려 화가 날 정도이다. 가비타가 베베에게 말하듯 그녀는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그저 룸메이트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곧 오틸리아 자신의 입을 통해 주어진다. 시술을 받은 가비타를 홀로 호텔방에 남겨둔 채 남자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은 오틸리아는 남자친구와의 언쟁 끝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임신하면 어떻게 할 건데? ... 전혀 이해도 못하면서 뭘 도울 수 있다는 거야? 적어도 가비타는 날 도와줄 거야!”
자신 역시 언제라도 오늘의 가비타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으며, 그때 자기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친구뿐이라는 걸 오틸리아는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영화 내내 가비타의 아이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등장하거나 언급되지 않으며, 그녀를 돕는 것은 비슷한 일을 겪은 친구들이거나 ‘자신 역시 그런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는 오틸리아뿐이다.
내가 임신하면 어떻게 할지 생각이라도 해봤느냐는 오틸리아의 물음에 “넌 임신 안 했잖아. 임신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라며 대화를 회피하는 그녀의 남자친구와, “넌 섹스 할 때만 좋지?... 조심하라고 부탁했잖아!”라고 지친 듯 소리치는 오틸리아의 대화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 낙태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모든 전후 맥락—가비타는 어떻게 임신하게 된 것인지,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4개월 3주 간 어떤 고민을 거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을 포기하고, 낙태가 불법인 사회에서 낙태를 결심한 여성/소녀들의 악몽 같은 하루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지점을 명확히 한다.
불법이기에 공식적으로는 낙태가 존재하지 않던 1987년 루마니아에도 낙태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모두가 피하고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이 여성들은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시술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고 심지어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며 태아들은 버려지고 있었다는 것. 끔직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마주보기를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괴로움’과 ‘불편함’의 정체이다.
낙태시술 장면과 화장실 바닥에 버려진 태아의 모습을 고집스레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마치 ‘자, 보아라. 이것이 당신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다!’라고 관객에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가비타의 선택의 도덕성을 따지기 이전에, 낙태의 합법 혹은 불법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낙태에 관한 어떤 형태의 논의도 현실성을 가질 수 없다.
악몽 같던 하루의 마지막, 아기를 잘 묻어주었는지 묻는 가비타에게 오틸리아는 조용히 “다시는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말자”고 말한다. 가족과도, 아이의 아버지와도 함께할 수 없었던 끔찍한 하루를 공유한 친구이지만 이 순간 가비타의 경험은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없던 일’이 되어 마음의 무덤에 묻힌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1987년 루마니아의 현재를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현재 역시 수많은 묻혀진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