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름이 뭐예요?”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경험 중에 하나가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다. 일본에서 일본 이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재일조선인들이 많다는 현실을 알면서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혹시 일본 이름도 있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질문할 테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아마도 재미동포들의 미국식 이름을 “멋지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재일동포들의 ‘일본식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어떤 사람은 이름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또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어떤 젊은 엄마는 남편을 “~사마”, 딸을 “~짱”(일본식 경칭,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한일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진 현실속에서 일본은 반감을 벗어나 취미와 즐거움의 대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에게는 일본이름이 있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한 일본에 대한 여유로움 때문일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
10년 전에 한국인 감독이 찍은 <본명선언>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통명’(일본이름)으로 학교를 다니던 재일동포 아이가 자신의 ‘본명’(조선이름)을 고백하는 과정을 찍은 내용이다. 이 영화 제목으로도 채택된 ‘본명선언’이란 말은 일본사회에 동화된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본래 모습을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재일동포 아이들 자신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본명’을 썼다 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한다면, 본명선언은 자기해방을 향해 거쳐야 할 중요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사실 조선학교에서 조선이름을 쓰고 지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름과 관련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친구 한명 없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경우, 자신이 ‘조선인’이란 사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정체성을 고민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 상황이 그저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인’이라는 흔들림 없는 정체성은 일본사회와 단절된 조선학교의 커뮤니티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에 익숙하지 않는 조선학교 학생들은 일본사회에서 혼자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 또한 비디오 가게에서, 미용실에서 그토록 자명한 ‘본명’을 말할 수가 없어 슬쩍 일본이름을 쓰곤 하였다. 어린 마음에 뭔가 석연치 않는 느낌이 들었으나 한순간의 ‘가면’은 나를 심각하게 흔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바로 당당한 조선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이중 기준을 가진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일본학교를 다닌 재일조선인 친구를 대학에서 만나서부터다. 그들 중에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사람으로 살아온 친구들도 있었고, 일본사회의 ‘이물질’로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온 성숙한 친구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경험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괴로워 보였다. ‘가면’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때부터 나는 내 정체성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전까지는 내 인생에서 일본이름은 단 한번도 필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결심이 좌절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명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다가 7번을 거절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잘 눈치 채지 못했다. ‘이미 누굴 뽑았겠지.’ 그러나 분위기 좋게 면접을 봐도 떨어졌다. 시간당 아르바이트인데 뭘 그리 따지는 걸까. 근사한 식당이라서 외모에 까다로운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 했지만 비로서 “명찰(네임 프레이트)을 일본이름으로 표시할 것”이라는 조건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일본사람’으로서 6개월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 중 호감이 가는 몇 명에게는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반응은 대충 두가지로 나눠진다. “그래서 뭐?”하는 무관심한 사람들과 “그래도 너를 일본인과 똑같이 대할테니 걱정마라”는 ‘양심적인’ 사람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바깥세상’을 알아갔다. 일본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어렸을 때부터 경험해온 긴장감, 소외감, 좌절감을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동포학생들의 민족적 권리를 위한 동아리 활동에 열중하였다. 일본학교 출신자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쳤고 우리 노래와 역사를 함께 배워갔다. 그런데 이 동아리 활동에는 동포들을 끌어들이는데 항상 어려움이 따랐다. 바로 이름 때문이다. 일본이름을 쓰는 한 누가 ‘동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동포학생 찾기’를 해야했다. 얼굴을 보고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동포’들은 서로를 알아내는 특별한 감각이 있다) 가장 큰 힌트는 역시 이름에 있었다. 잘 보면 재일동포들의 일본식 성(姓)에는 특징이 있다. 원래의 성이나 본관, 고향의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김씨는 카네다(金田), 카나야마(金山), 카네시로(金城), 박씨는 아라이(新井), 안씨는 야스다(安田) 등. 선배들이 가르쳐준 방법을 따라 각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듣는 강의에 들어가 이러한 이름을 가진 학생들을 찾았다. 찾을 수 없는 경우는 행정실에서 명단을 받아 전화를 걸었다. 어떤 학생들은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어떤 학생들은 우리를 ‘흥신소’(고객의 요청에 따라 대가를 받고 기업이나 개인의 신용이나 정보를 몰래 조사하여 알려주는 일을 하는 사설기관)처럼 여겨 피했다. 만난 학생들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본명선언’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처음엔 마음을 열지 않았던 후배들이 조금식 민족적으로 각성되어 가는 모습을 접하면서 나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본명선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여러 상처들을 주고 받았던 기억도 난다. 사실은 그 기억이 더 생생하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취했던 방식이 얼마나 오만하고 비인권적이었을까. 일본사회에 매몰되어가는 한명 한명의 학생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거창한 사명감을 가진 ‘조선학교 출신자’들의 정의감은 얼마나 권력적으로 비쳤을까. 그것도 남성중심의 가치관속에서 나 또한 ‘명예남성’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막연했던 위화감은 그 후엔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변했고, 20대의 오랜 기간 깊은 고민거리로서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이 철없는 시절의 경험들은 그러나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사회의 소수자들이 어느 단계에선 경험하게 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결과이자, ‘디아스포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여러 권리와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비난의 화살을 자신들 내부로 돌리기 시작할 때, 조국에서 소외된 디아스포라들이 ‘민족적 순수함’을 서로 따지기 시작할 때, 게다가 그 ‘순수함’을 위해 부여되는 역할이 남녀에 따라 다르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상호 소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일본이냐, ‘조선’이냐, 남이냐 북이냐, 제3의 길이냐. 살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자신이 귀속할 곳을 선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 재일동포들은 그래서 개인의 선택에 대해 서로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재일동포들에게 이름을 둘러싼 고민은 그러한 끊임없는 선택의 출발점이다. 물론 한명 한명이 본명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선택을 개인에게 바라기 전에, 그 선택을 책임지는 일본사회를 검증해봐야 한다. 선택의 권리는 개인에게 있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는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재일동포들의 이름에는 각개의 특별한 사연들이 있다. 그리고 현재도 ‘본명선언’은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본명을 ‘선언’해야 하는 현실. 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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