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를 인정받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

여성뮤지션③ 아니 디프랑코, 여성주체와 성적 독립 사이에서

성지혜 | 기사입력 2008/03/31 [14:54]

섹슈얼리티를 인정받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

여성뮤지션③ 아니 디프랑코, 여성주체와 성적 독립 사이에서

성지혜 | 입력 : 2008/03/31 [14:54]
이상한 ‘그 여자’
 
▲ Ani Difranco [like i said] 1993 
다른 때라면 몰라도 여성이 페미니스트에다 성적소수자라는 코드를 동시에 갖고 있게 되면 그는 더욱이 ‘그 여자’로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례로 성별 문화의 세계에서는 오직 이성애적 바탕을 가진 이름만을 인정하므로,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양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차이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런 만큼 오늘 이곳에 소개할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 역시 이성애중심주의자들에게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쉬운 뮤지션이다.
 
여기서 레즈비언이란 용어가 논란이 될 수 있다. ‘정상성’이라는 허구의 논리에 빗대 몸의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일탈적인 집단으로 정체화시키는 것 자체가 설득력 없는 구획인데다, 제도적 보호장치를 위한 용어라고 해도 아니 디프랑코에게 그 개념이 합당한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의 레즈비언은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있어 문화 ‘형용사’적인 의미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아니 디프랑코의 ‘Do It Yourself'
 
아니 디프랑코는 대외적인 전성기 동안 펑크의 수혜자답게 평화적 공존보다는 급진주의적인 행동가로서의 애티튜드를 선보였었다. 1990년대 그의 음악은 이른바 ‘안티포크’로 일컬어지며 펑크와 포크, 소울풀한 그루브 등의 풍부한 사운드로 채워져 있다. 편견 아닌 편견이지만, 사회비판에 중점을 둔 뮤지션일수록 대부분 감각적인 면은 약화된 경우가 많은데 아니 디프랑코는 확실히 유행하는 미감에 있어서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은 정치적인 인상과 육체적인 질감을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의 확고부동한 장르에 이질적인 요소를 섞는 단선적인 퓨전이 아니었다. “나는 불협화음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을 비판할 것이다”라는 강경주의적인 입장에서 드러나는 의지들이 음악에 반영되어 있었다. 연주 구성이 미니멀한 편임에도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스타일리쉬한 느낌이 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혼종성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 Ani Difranco [knuckle down] 2005 
묘하게 재미있는 것은 그 주요한 음악적 테마들에서 의존적이지 않은,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의미의 공통적인 문화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펑크의 ‘Do It Yourself’ 정신이 그러하고, 언제 어디서나 기타 한 대로 송라이터의 진솔한 감수성을 발휘하는 포크의 색채가 그러하고, 랩음악의 자유분방한 형식이 그러하다. 게다가 그는 구속 받지 않는 음악작업을 위해 자신의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며 음악을 시작했다.

 
‘(백인양성애자) 페미니스트’라는 정치적 이미지 이전에, 이미 그는 자율적으로 욕망을 어필하는 음악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인종주의와 주류계급문화에 반대하는 입장들이 대중음악에서 흑인적인 자아와 백인노동계급적인 자아로 표출되는 장르들의 접점에서, 그리고 젠더의 속박에서 성적 주체가 개인으로 변환될 수 있는 지점에서 그의 음악은 시작되었고 변화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레즈비언적인’ 성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여성’ 뮤지션이다.
 
그러나 아니 디프랑코의 전설적인 면모도 언제까지나 관심과 찬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최근 들어 더욱 ‘대중적이 된’ 그의 음악과 태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니 디프랑코도 그래 봤자 문화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반문화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거나(혁명이 아니라 쇼맨십이다), 음악적으로도 그렇게 독창적이지는 못하다거나 하는 회의적인 평들이 그의 일련의 행보와 풍문에 덧붙여지고 있다.
 
이러저러한 세간의 의심들은 어떤 점에서는 맞는 지적들일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그는 어느덧 딸의 ‘어머니’가 되었고, 구조의 요구들은 변화하고, 그의 음악은 펑크적인 태도보다는 초기 포크적인 스타일(최근작인 [Canon]의 경우)로 되돌아갔다.
 
매력적인 반항들이 곧잘 독기가 제거된 채 자본주의 문화산업에 포섭되고, 전위적인 예술에서 자양분을 흡수한 몇몇 대중문화들이 일회용 퍼포먼스로 변신하듯이 그의 음악도 더 이상 전과 같은 위치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부르주아문화를 거부하다 사회와 동떨어져갔던 이전 세대와 달리, 각 쟁점에서 직접적인 투쟁으로 맞서려 했던 펑크 역시 이전의 소용돌이와 유사하게 전개되어버렸듯이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다루려는 것은 그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이 아니다.
 
레즈비언의 남성 독립?
 
▲ Ani Difranco, righteous babe phoster
근육질 팔을 드러내고 맹렬한 페미니스트의 메시지를 자신이 만든 음악에 담아 노래하면서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의 카리스마를 뽐내는 뮤지션, 거리낌 없이 양성애자임을 공표하고 욕설을 서슴지 않던 이 여성에게서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을 우리는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은 사회적 맥락에서 차이가 있는데, 우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레즈비언은 비의존성이라는 개념과 결부될 때가 많다. 자신을 명백한 이성애자라고 규정한 이들에게 레즈비언은 성의 차이와 이성관계에 있어 여성의 ‘타고난’ 운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들은 각종 남성 존재자에 소속되어야만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여성성’이라는 타자성의 질서체계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성애에서 ‘독립’하여 욕망의 종류와 대상, 관계의 유형을 다르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 여성들은, 있을 수 없는 존재이면서 외부에 놓인 영역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때로 혹은 자주, 양성애나 동성애를 동일한 레즈비언적인 영역으로 범주화하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예술문화에서 레즈비언을 ‘정상적인’ 이성애관계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여와 뒤틀림의 환영으로 보거나, 그들이 남다른 ‘자유의지’로 체제를 전복했다고 보는 입장들은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여성성의 가장 본질적인 토대를 ‘남성의존성’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여성의 정체성이 그 자체로 불경하거나 자족적이라는 성급한 판단이 가능하다면, 결국 그것은 다른 논조로 닮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 만족을 구하지 않는 여성은 총체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독립적이어야만 인정 받을 수 있는가? 연애관계만 놓고 보자면 그들은 분명 이성애자 여성에 비해 일반 남성에게 덜 의존적일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이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면 배제되어 있는 상황들은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화된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타고났느냐, 선택했느냐’로 구분하려는 것 역시 각 삶의 현실적인 복잡성을 떠올려볼 때 천부당 만부당한 견해이다. 타고난 것이라면 더 이상 이상한 ‘취향’을 가진 여자로 취급 당하지 않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리어 인종주의적 편견과 유사한 억압적인 틀에 갇힐 위험이 있다. 만약 선택한 것이라면 그는 자유롭게 권리를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선택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다.
 
이성애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들을 세계의 바깥쪽에 놓는 이 폭력적인 정체성 판독법이 증명될 수 없는 가운데, 위와 같은 이분법으로 여성의 비의존성이나 탈주를 정의하려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을 다시금 확증하는 작업이 되기 쉽다.
 
독립적인 섹슈얼리티를 책임지는 것의 어려움
 
▲ Ani Difranco [knuckle down] phoster
만약 아니 디프랑코가 주류 이성애자 남성이었다면 “정치적인 뮤지션으로서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는가?”만이 관건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인 이유로 그는 조금 다른 정황에 놓여있다. 이를테면 주류 권역에서 나름의 입지를 가지고서 성별에 도전하고 그에 대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이 여성의 예술적 태도에는 언제나 계급적인 노선과 성적인 위치의 충돌이 내재할 수 있다. 여성이 ‘자율적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결정이나 행위는 이익들의 다툼 속에서 모순을 노출하기 쉽다.

 
주류 남성의 경우에 개별 주체로서의 선언(“나는 나일 뿐!”)은 곧 독립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리를 동반한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그 두 가지가 함께 보증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욕망이라는 것은 구조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변형되어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을 가졌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성이 날 때부터 부여 받은 성적 규범에서 독립적인 섹슈얼리티의 이름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는 아니 디프랑코뿐 아니라, 성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비판적인 여성예술가 전반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등급 상승이나 제도적인 보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대를 가리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성관계의 율법에 따라야 하는 여성은 온전한 개인이 아니다. 물론 여성은 좋아하는 남자와 직업과 패션을 선택할 수는 있다(이 또한 정말 그 선택이 자발적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적 역할을 내면화했을 때에나 가능한 결정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디프랑코가 페미니스트로서 얼마나 내실 있는 선택을 해왔는지와는 별개로, 그가 무제한의 자유를 선전하는 이 기만적인 사회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며 겪었을 내적 갈등을 왠지 예상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어떤 저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이성애라는 신화는 인간의 어떤 특성들을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만이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왔다. 그러나 다른 삶의 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예술에서도 여전히 허용되지 않은 성적 경향을 말할 때, 특히 이미 태어날 때부터 타자인 여성의 몸으로 독립적인 섹슈얼리티를 주장할 때에는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번외(番外)의 이름을 뒤집어써야만 상품으로서의 기회라도 주어진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존재 성격을 비정상으로 부르는 것을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왜 비정상이냐’고 물을 수 있는 이 아이러니 한 상황들이 어느 면에서 레즈비언 혹은 레즈비언적인 저항들을 패배감으로 몰아넣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이유에서 레즈비언은 한 사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제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는 어떤 여성철학자의 말은 다시금 많은 것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니 디프랑코와 같은 여성예술가들이 섹슈얼리티를 위해 투쟁할 적에 빛나는 것들과 그러한 노력들에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반복적인 사회적 갈등들을 보면서, 지금 나는 여기서 삭제되거나 부정된 내 안의 성적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과제를 삶 속에 기록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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