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아픈 전쟁의 상처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은 이를 겪어낸 사람들의 입으로 이야기되지 못했다. 가족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쟁의 경험은 침묵되었다. 특히 전쟁 속 여성들, 그리고 전쟁 후의 일상을 겪어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사자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다.
일다는 여성들의 기억 속의 전쟁과 그 후 삶의 이야기를 통해, 제대로 쓰여지지 못한 우리의 현대사를 비추어보고 전쟁과 여성, 전쟁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다가가 ‘군비’ 이야기를 꺼내는 69세의 여성, 얼핏 보기에도 박봉자(세례명 ‘노사리아’)씨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들 잊어버리고, 자기 삶 사는데 급급해” 당시의 기억을 꺼내려고도 하지 않지만, 박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지배했던 전쟁의 경험과 그 속에 희생된 사람들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왔다. 이제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끄집어내어, 전쟁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다. 빨치산의 딸 박봉자씨가 말하는 전쟁 “1948년에 여순사건이 터지고, 형사들이 장화 신은 발로 긴 칼을 차고 집안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유치장에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셨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되셨는지 몰라요. 할머니는 일년 간이나 밥을 해놓고 아버지를 기다리셨죠.” 당시 35살이었던 아버지 박세열씨의 소식은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구례 쪽으로 끌고 가 구덩이에 묻었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구속되던 때 만삭이었던 어머니는 이후 아들을 낳아 유치장에 가서 그 소식을 전했는데, 기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박봉자씨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남동생을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1949년 5월에 아기가 병이 나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남편은 잡혀가고 아들은 죽고.” 전쟁 당시 29살의 어머니 구복순씨는 여맹활동을 했다. 산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옷을 지어 입히는 등 일을 돕다가, 시부모와 어린 두 딸을 시골로 피신시키고 맏이인 박봉자씨를 데리고 입산했다.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이다. 12살이던 박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곳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산에서 생활했다. 10월 말경, 어머니는 상황이 “위험하다”며 딸을 남자들 손에 맡겨 다른 골짜기로 보냈다. 그것이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후 어머니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를 다룬 책이 나와서… 어머니와 같이 있었던 선생님들(박선애, 박순애씨)도 만나고. 89년인가 90년인가, 그 분들 통해서 알았지요.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사지를 절단 당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어요.” 삶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세 딸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설움은 지금까지도 박씨의 가슴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하숙생 들이는 집에서 밥 해주면서 살았는데. 야간이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등록금 7백 원이 없어 못 갔어요. 하숙집에서 노트 빌려다가 언니들 숙제 대신 해주면서 밤에 공부했어요.” 그러다 어느 개인병원에 심부름 일을 하러 들어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병원에서 간호 일을 배우게 됐다. 밤이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낮이면 병원의 궂은 일들을 하면서 10년을 일했다. “병원생활 하면서 죽으려 한 적도 두 번 있어요. 힘들고 고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서. 아, 또 눈물이 나네요.” 그래도 사랑을 주고 받았던,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존재가 박봉자씨의 삶을 지켜주었다. 병원에서 맺은 인연들, 원장님과 대모님, 박씨가 결혼할 때 기꺼이 신부의 가족이 되어주었던 환자들 등, 많은 이들이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박씨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자상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내겐 있어요. 딸만 셋 있어도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몰라요. 시골 살아도 당시 세상에 여자아이도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던 분, 그 기억 가지고 살았기에 나는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생들에겐 부모님에 대한 그런 기억조차 없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어린아이였던 두 여동생들의 삶은 더 힘겨웠을 것이라고 박씨는 생각한다. “막내는 부잣집 양딸로 보내졌는데, 내가 19살 때 경상도 포항에 가서 14살이던 동생을 데려왔어요. 공부는커녕 심부름만 시키고 있었죠. 그 애는 내가 데려와서 학교도 보내고 직장도 알아봐줬어요. 근데 둘째는 지금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 고생 많이 했죠, 동생도.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기도 하고. 지금 저에게 남은 과제가 둘째를 찾아보는 일이에요.” 지난 날의 서러움과 노여움을 다 풀어내지는 않았지만, 박봉자씨는 고향사람들과 인척들의 태도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당시엔 행여나 붙을까봐, 부모님 살아계실 땐 그렇게 잘해주더니, 빨갱이 가족이라고 해가 될 까봐” 도움 주는 이가 없었다. 박씨의 가족들을 “없는 집안인 셈” 쳤다. 우리 역사를 배우는 시간들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장기수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남부군>을 읽고서 어머니와 당시 친구였던 분들을 만났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분들과도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조금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봉자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당시 임실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지만, 진실규명을 신청한 유족들은 손에 꼽힌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압박을 받을지 모르니까” 덮어둔다는 것이다. 그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어 임실유족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3년, 남편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라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의 경우엔,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남부군>을 읽고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도 거기 있었다”고 말해줬다. “예전엔 명절 때마다 울었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막내가 엄마, 왜 우린 외갓집이 없어? 물을 때면 또 눈물이 났어요. 이제는 안 울죠. 우는 대신 이런 일을 하니까 위로가 됩니다.” 박봉자씨는 유족회 사무실에 가면 볼 수 있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 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라는 글귀를 소개했다. 시체도 발견하지 못하고 묻어드리지도 못한 부모님, 총알을 맞고 쓰러지던 숱한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진실을 덮어두고 모른 척 해온 우리 사회에 대해 그는 “이제 무서울 것 없이” 싸우겠다고 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에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죠. 전쟁이 어떤 것인지 교육하고, 다시는 겪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쟁 위협 없는 나라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도 전쟁을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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