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아직 벚꽃의 향취가 남아 있는 4월 말, 일본 간사이국제공항에서 내려 교토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교토(京都)를 찾는 건 이번이 세 번째. 네 번의 해외여행 경험 중 세 번을 바로 이 교토를 거쳤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관광객으로서 교토의 매력에 끌렸다. 교토는 전통과 현대, 도시 문명과 자연이 세련되게 결합되어 관광객을 유혹한다. 교토를 즐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혼자 느긋이 산책을 하는 것이다.
벚나무 아래에는 처음 교토를 찾았을 때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다음 해는 신록이 우거진 5월. 그리고 올해 가까스로 교토 벚꽃의 막차를 탔다. 때마침 이조성(二條城, 니죠죠)에 벚꽃이 필 때만 설치되는 라이트업 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성을 시작한 이조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도쿠가와 막부의 화려했던 영화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성이 아니라, 어둠 속에 정교한 조명을 받으며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있는 벚나무였다. 아기 주먹만한 꽃송이가 작은 공처럼 뭉쳐 있는 벚꽃,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벚꽃 등 그 종류도 다양한 벚꽃이 조명 속에서 만들어내는 풍경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벚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벚꽃이 저렇게 멋지게 피어나는 일 같은 건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 (카지 모토지로 <벚나무 아래에는> 中, 1927년 작) 엷은 핑크색의 꽃 색이 피를 연상시켜서일까? 극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작가의 미의식이 별로 호감이 가지는 않지만, 반지르르한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는 벚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이 구절이 떠올랐다. 조명 속에서 벚나무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귀기까지도 감돌았으니 말이다.
도시 한복판의 공동묘지 첫날 여장을 푼 하나조노 카이칸. 절에 딸린 현대식 건물로 콘도 같은 느낌이었다. 깔끔한 다다미방에 꽤 맛있는 일본식 아침식사 포함 6천엔 정도의 가격을 감안하면 훌륭한 숙소였다. 비슷한 가격에 좁디 좁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식당을 가득 메운 한국인 단체 여행객들 사이에 끼어 맛도 없는 뷔페 식을 먹었던 첫 여행을 떠올리니 호강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자 밝은 빛과 함께 쏟아진 풍경에 살짝 탄성이 나왔다. 2천여 개의 사찰과 신사 등이 남아 있는 천년 고도답게, 창밖에는 사극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고찰과 신사와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일반 가옥들이 산과 함께 어우러져 순식간에 과거 속으로 차원 이동을 해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문득 그 풍경 속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공동묘지라는 걸 깨달았다. 일본여행에서 이 같은 풍경을 마주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본의 장례문화는 화장이 대부분이고 보통 가까운 공동묘지에 모신다. 굳이 절 옆이 아니라도 도시 한복판 고급주택 사이에서 묘지를 발견하는 게 전혀 이상한 풍경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공동묘지가 공원처럼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며 위화감이나 두려움 없이 접근한다. 납골당이 혐오시설로 분류되는 우리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묘지의 모습은 결국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에서 묘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공간이 되기에 한국의 묘지들은 너무 멀고 거대한 것 같다. 시신을 훼손하지 않고 좋은 곳에 모셔야 후손이 잘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양지바른 산자락을 깎아 공동묘지를 조성한다. 산은 죽는다. 거대한 공동묘지들은 그대로 ‘산의 무덤’이 된다. 우리는 죽음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죽는다는 것은 그저 떠나는 것이면 안되나.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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