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또다른 폭력을 만들 때

극악한 행동을 저지를 때 나타나는 ‘해리’

최현정 | 기사입력 2008/06/13 [14:14]

고통이 또다른 폭력을 만들 때

극악한 행동을 저지를 때 나타나는 ‘해리’

최현정 | 입력 : 2008/06/13 [14:14]
고통을 겪어낸 분들을 만나보면, 사람은 참 순하면서도 강한 존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만나 뵈었던 분들이 이를 증명해주었습니다. 살아내려는 생존의 의지는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습니다. 그 의지를 목격하면서, 저의 삶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의 역사는 특정 누구에게 지워진 운명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이라 합니다. 허나 고통을 통과한 누군가는 선을 행하기를 선택하지만, 고통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는 악의 굴레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선하고 강한가와 동시에, 사람은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선과 악의 정의는 제 경험 너머에 있는 어려운 이야기인지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을 악이라 한다면 누구나 악한 행동을 저지르게 될 수 있으며, 사람이 악한 행동을 저지를 때 악이 탄생한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입니다.
 
히틀러에게 무슨 정신장애가 있었다는 숱한 이야기들처럼 악을 정신병리로 설명하려는 현대의 사고체계에 대해 전달하거나, 인간에게 악의 싹이 있다는 무용한 냉소를 전하기보다는, 악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고통이 어떻게 다시 악으로 전달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며 ‘정신을 놓는’ 해리 현상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게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가 나면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러놓고도 화가 가라앉으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분에게 물었더니, 폭력을 행할 때에는 주변이 요상하게 보이고 자기가 뭘 하는 줄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범죄자를 만나는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중에 ‘정신을 놓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해리’라고 합니다.
 
해리란 생각, 감정, 행동과 같은 심리의 구성 요인들이 전부 분리되어 따로 작동하는 현상입니다. 가끔씩 멍해질 때가 있으시지요. 이름 붙이자면 일종의 해리 경험입니다. 좀더 심각한 해리를 들자면, 기억상실에서부터 마치 꿈꾼다거나 다른 세계에 와있는 것 같거나, 주변환경이 이상하게 변해 보이는 경험, 나로부터 분리된 느낌, 혹은 경험이 연결되지 않고 감정이 둔탁해지는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끔찍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서 보이듯이, 실제로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중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끔찍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폭력의 가해자들은 감정으로부터 차단되고 피해자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해리 상태에서 폭력을 자행한다고 합니다.
 
해리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면서도 극악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싶습니다. 일부 범죄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자기 자신의 행동에 의해 심한 심리적 충격을 받기 때문에 범행도중 해리 상태가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학대와 폭력을 당한 경험이 '해리'의 원인이 돼
 
▲증언 <일러스트- JUNGEUN>
사실 해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심각한 심리적 후유증 중 하나로,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현되었던 심리적 방패막이 후유증으로 남는 심리적 작동에 해당됩니다. 실제로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않는 심리적인 탈출을 통하여 인간은 고통을 견뎌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해리가 지속된다면 문제입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 속에는, 끔찍한 살인현장 안에서 나타난 해리경험으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전장에서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예기치 못한 해리 경험으로 고통스럽다 합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를 경험한 많은 생존자들은 학대의 순간에 발생하여 그로부터 지속되는 심각한 해리 경험에 대해 말합니다. 현재 많은 연구들은, 어린 시절의 심각한 학대가 해리 경험의 원인이 된다는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차라리 감정을 끊어내는 방식으로 학대를 감당하고자 분투합니다. 이들이 생존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격렬한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마치 이를 느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해리 또한 발동합니다. 감정을 경험하는 인간의 소중한 능력이 상실되고 삶은 나무껍데기 마냥 메말라갑니다.
 
폭력은 순환한다는 일반적인 설과는 달리,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속합니다. 그러나 가해자들 대부분에게 폭력을 경험한 과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감정을 느끼는 소중한 능력을 앗아버린 환경의 극악함에 씁쓸할 뿐입니다.
 
이들은 생존의 기제로 해리를 터득하게 되었지만, 폭력의 가해자가 되면서부터 생존의 기제는 악을 재생산하고 맙니다. 고통으로부터 생존하려던 인간의 투쟁이 또 다시 고통을 되풀이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건 참으로 사무치는 사실입니다.
 
악에 대면하기: 고통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몫
 
고통은 있지만 악인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명백하게 악으로부터 고통을 받으니 말입니다. 고통이 왜 악으로 변하는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와중에, 또한 같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판단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렵고, 결론을 짓기는 주제넘어 보입니다.
 
허나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의주시할 수는 있습니다. 폭력을 모면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사람들은 머리 안에서 끼적거린 명분을 근거로, 폭력을 모면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들에게 악을 실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자신의 명령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파괴시킨다는 사실로부터 해리된 채, 인간의 선함에 도전하는 극악한 환경을 조장합니다.
 
말로써 악을 명령한 사람들은 그것이 악인지조차 모르고 살인자들이 끔찍함을 못 느낀 채 범행을 자행하듯 감정 없이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폭력의 현장에 있는 이들은 눈앞에서 자행되는 악으로 해리되어야 하고, 그 악은 개인의 선함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고 악에 다시 대면하자면, 해리되지 않은 또렷하고 맑은 정신이 목소리를 내어 세계의 정신을 맑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몫이자, 고통에서부터 선으로 나아간 인간의 고귀한 가능성에 의지할 일입니다.
 
※이 기사는 신문발전위원회 2008년 소외계층 매체운영 지원사업의 보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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