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인 2006년 5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졸고 있던 나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하루 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피곤이 확 달아났다.
뉴스는 재일동포사회의 “민단과 조총련이 화해”한다는 내용이었다. 들으면서 ‘설마’ 하는 생각이 자리잡았지만, 초조해진 마음으로 집에 가서 다시 뉴스를 봤다. 역시 사실이었다. 그 동안 서로 대립해왔던 역사 끝에 이루어진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남북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화해는 한달 뒤에 백지로 돌아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나 역시 낙심천만이었다. 민단의 지방 조직들이 북한인권 문제 미해결을 이유로, 민단 중앙본부의 결정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난 것이 두 조직의 화해를 백지상태로 철회시켰던 것이다. 화해문서에 서명한 민단 단장이 해임되기도 했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분단’된 재일동포 사회 재일조선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38선’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일본 내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긴 시간동안 대립과 반목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살게 되어서야 그런 재일조선인 사회의 ‘특징’이 훨씬 더 눈에 잘보이기도 한다. 어떨 때는 오히려 실제로 분단선상에 있는 한국사회가 재일조선인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밝게 보이기도 한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선 일상에서 끊임없이 분단을 느끼게 되지만, 오히려 분단의 한가운데 있는 한국 땅에서는 분단을 망각하고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라고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는 한국적, 조선적(분단되기 전 조선을 뜻하며 현재 무국적으로 취급되는 법적 지위), 일본국적 소유자, 이렇게 세 가지가 포함된다.
내게 민족심이 싹조차 트지 않았던 어린 시절, 명절에 외가에 놀러 갈 때면 설레임과 동시에 다소 불안함도 스며들어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코하마에 사는 외숙모 가족들은 모두 조총련 소속이었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말”로 이야기를 했다.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데다 또 그 집 삼촌은 박력이 있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릴 때면 어린 내게는 마냥 “공포”의 대상이다. 그 삼촌하고 또 다른 친척 누군가가 큰소리로 “의논”(내가 놀라면 어른들은 항상 이렇게 설명했다)하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무서워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주된 원인은 꼭 정치 이야기였다. 그 집 아들과 딸이 북송사업으로 이북에 “귀국”했고, 외할머니는 북에 갔던 조카들을 늘 걱정하셨다. 일본학교에 다닌 어머니, 조선학교에 다닌 이모 소속되어 있는 조직이나 국적 혹은 사상 때문에 대립과 분열이 잦은 탓에, 그렇지 않아도 총 인구가 많지 않은 재일조선인들로선 어떤 목적을 위해 함께 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지도 못하는 국경선 너머에 사는 것도 아니고, 바로 친척이나 가족 내에 섞여 있다는 점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비극과 갈등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대학교 내의 동포 동아리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민단계, 조총련계가 있고 ‘민족심’이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신입생들 중에는 몰래 두 동아리를 모두 다니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새 학기가 되면 동아리간에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한 쟁탈전도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신입생들은 두 곳을 다니는 것에 대해 양쪽에 미안해서 말하지 못한 채 양다리를 걸치곤 했다.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대학생들으로선 하지 않아도 될 마음 고생일 수밖에 없었다. 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에 부쳐야 할 사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활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정치구조 때문에 개인이 짊어져야만 하는 정신적 부담이 너무나 크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기 힘든 복잡한 이유들이 있으니, 그 사실로 인해 스스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 6 남매 중 세 사람은 일본학교를, 나머지 세 사람은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녔다. 둘째였던 어머니는 첫째 이모와 막내 이모하고 어린이집부터 대학교까지 일본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는 현재에 비해 더더욱 차별이 심해서, 일본학교에 본명(민족명)으로 다니기는 상상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어머니도 일본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본인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도 그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고 얘기하셨다. 반대로 민족학교인 조선학교를 다닌 이모들은 교복부터가 치마저고리이고 학교 교사, 친구, 선후배 등 주변에는 조선인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사용하고 민족역사을 배웠고, 그 당시는 특히 일본에 대한 반감이 현재보다 더 많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학교 다닌 사람들과 조선학교 다닌 사람들과는 분위기나 삶의 방식, 한반도 정치에 대한 가치관 등이 상당히 달라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자기 삶과 직결된 분단과 갈등의 문제 그래서 언제 들었던 “밥상 위의 38선”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통감한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그토록 한 가족끼리 다른 정치적 이념으로 나뉘어서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정치적 사상 차이나 방향성이 맞지 않아 워낙 크게 싸워서 인연을 아예 끊고 사는 어른들 이야기는 주변에서 싫증나도록 여러 번 들었다.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한자리에 모였는데 서로 꼴도 보기 싫다는 식으로 말도 안 하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서로를 적대시해왔던 남북한의 관계처럼 말이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다른 어떤 동포사회보다 남북한의 관계에 의해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재일조선인들은 조국의 분단으로 일상에서 분단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조국의 분단을 지금도 아파하며, 분단이 하루 빨리 종식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재일조선인들 중에 지금도 조선적을 유지하며 남북한 체제 중 어느 한쪽으로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존재는, 온몸으로 이러한 현실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에게 남북한의 통일문제는 자기 삶과 직결이 되어 있는 절실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재일조선인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국경너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