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바닷가, 통영에는 내 친구가 살고 있지. 그립다는 생각만으로 무작정 달려가도 ‘임 그리운 아낙네’가 되어 한달음 달려 나오는 내 친구. ‘뼛속 깊이 통영을 사랑한다’는 내 친구는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섬들과 파도에 흔들리는 크고 작은 배들을 넉넉히 품고 있는 ‘통영바다’가 되어 있었다.
내 친구 송도자(46). 토박이들만 그 뜻의 오묘함을 안다는 ‘바로 그’ 사투리를 편히 구사하면서 <다가가기>에 대해 설명해준다. 사투리란 그저 어린 시절의 삽화적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나와는 달리. “대학 졸업 후 몇 년 동안 서울생활을 했지.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비비추’라는 꽃가게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네. 벌써 내 딸 고은샘이 대학생이 되었으니 말이야.” 초등학교, 중학교는 통영에서, 고등학교는 마산에서 다녔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뒤 잠시 의상디자이너로서 일을 하다가 다 접어두고 ‘뭘 하며 살 건데?’ 걱정하는 친구들을 뒤로 둔 채 고향으로 갔었지. 그러니까 사실 서울에서의 6, 7년 생활을 제외하고는 늘 통영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넌.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기도 했어. 내 삶이, 내 주변이. 혼자 몸으로 애도 키우고 꽃 가게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 그러던 중,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떤 분은 가족도 없고, 또 다른 분은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실지로 할머니를 부양하기보다는 정부지원금을 함께 나눠 쓰는 법적 자격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이 분들의 딱한 사정을 보니 그냥 지나치기도 어렵더라고. 그래서 제대로 된 법적 지원을 받도록 하려고 통영시청을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2002년 8월 15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을 만들게 되었어.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까 하고 시작한 것이었는데 어쩌다가 생업인 꽃 가게가 부차적인 것처럼 되어버렸어. 사는 게 힘들어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할머니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 조차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세월이 좀 늦게 가주면 좋겠다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나. 마음은 소녀인데 거울 보면 할머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았겠어?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들을 모시면서 내가 오히려 위로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어. 최근에 돌봐 온 여섯 분의 할머니들 중 두 분이 영면하셨는데 ‘늙은 소녀’들을 데려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도 하더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해가 1990년이란 것은 알지? 이듬해 8월, 故 김학순 할머니께서 최초 증언을 하신 이래 지금까지 213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정부에 신고를 하였어. 이를 계기로 전쟁 후에 운 좋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보다 소외와 수치심, 가난, 질병 등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내색도 못하고 살던 할머니들이 ‘낮은 목소리’를 내시게 된 거지. 매년 몇 분씩 돌아가시지만 현재 120여명이 생존해 있어.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곤 했었는데, 통영 및 인접지역인 거제에도 여섯 분이 생존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와 할머니들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지. 할머니들의 권익도 찾아드리고 봉사도 하면서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도록 보살펴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그랬구나. 어느 날 꽃가게가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은 할머니들이 살아생전 해보고 싶다던 ‘금강산 여행’을 주선했던 탓이었구나. 일요일, 쉬지도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문밖을 나섰던 것은 할머니들 생일상도 차려주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스님과 함께 떠나는 사찰기행’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는 시간을 얻어 정서안정을 이루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탓이었구나. 그랬구나. 가끔씩 꽃가게에 옆집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던 것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에 강제연행 인정, 공식사죄, 진상규명,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올바른 역사교육을 할 것을 촉구하는 활동 등에 참여한 탓이었구나. 마땅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니. 그런데 내 친구는 따지지 않고 행동했구나.
극단 한강의 <반쪽 날개로 돌아온 새> 초청공연이나 <다가가기>의 사진전, 영상전, 인권영화제 등을 통해 역사의 주인인 청소년들과 일반인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알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었지. 사실 우리가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나 ‘독도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기적으로 감정선을 건드리는 독도문제에 대해 그저 흥분과 분노만 간헐적으로 드러냈지. 명백한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국제논쟁의 한 가운데에 끌고 나옴으로써 기존사실에 대한 회의를 하도록 만드는 일본의 정교한 전략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식 속에는 할머니들의 역사를 누락시켜온 우리의 무지도 함께 있었던 거야. “<다가가기>나 기타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은 역사의 주인인 청소년들과 일반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알도록 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어. 가해자인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 온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만 가능해지리라 봤기 때문이지. 그게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야. 역사를 바로 아는 것, 그게 곧 평화 아닐까.” 아, 내 친구는 이미 평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어렵게 먼 길 돌아다니면서 이도 저도 놓친, 어설픈 지식인 노릇하는 나와 달리 ‘안마당에 환하게 피어있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내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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