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는 ‘그녀’와 함께

페미니스트의 음악 블로그③ 파이스트(Feist)

성지혜 | 기사입력 2008/08/09 [11:42]

여름휴가는 ‘그녀’와 함께

페미니스트의 음악 블로그③ 파이스트(Feist)

성지혜 | 입력 : 2008/08/09 [11:42]
▲ 캐나다 뮤지션 파이스트(Feist)
이번 글은 8월에 가장 흔한, 휴가철을 겨냥하려 해요. 하지만 물질적, 심적인 여유가 별로 없는 저와 같은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휴가=여름여행’이라는 공식은 사용하지 않으려고요. 여행을 가든지 가지 않든지 간만에 찾아온 휴가를 조용하고 깊게 보내고픈 분들이라면 함께 해도 좋을 여성뮤지션을 한 명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캐나다 뮤지션 파이스트(Feist)입니다.

 
파이스트(Feist)의 방
 
오프라인 음악잡지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됐던 해에 저는 그녀의 솔로 데뷔작 [Let It Die](2004)의 음반 평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는 ‘너무 조용하다’는 희한한 이유로 큰 감흥을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파이스트의 음악은 어떤 고요한 밤에 진가를 발휘합니다.
 
시끌벅적한 순간들이 지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 무렵의 고요함 속에 “Let It Die”가 배어들 때면,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은 그제야 다시 시작되는 듯 했죠. 이런 종류의 효과를 지닌 음악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방구석 음악”이라고 부르던데, 표현 한번 절묘합니다. 그녀의 음악도 혼자 들으면 더 좋은 음악, 열린 공간보다는 자기만의 방에서 더 잘 울려 퍼지는 듯한 음악이죠.
 
어린 시절부터 밴드 생활을 거쳐 온 덕인지-영국의 락밴드인 Placebo와 동명인 펑크락 밴드와 프로그래시브한 인디락 밴드 Broken Social Scene을 거치기도 했죠- 아니면 타고난 실력 덕인지 그녀는 기본기가 아주 훌륭한 뮤지션입니다. 하지만 파이스트를 그저 ‘베테랑’이라고 지칭한다면 뭔가 안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 파이스트 [Let It Die] 앨범재킷 2004
그만큼 그녀는 전문가 이미지보다는 참신함이 도드라지는 뮤지션이죠.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멋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본다면 아무래도 후자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업계용어(?)로 풀자면 그녀는 참으로 ‘인디스럽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인디’입니다.

 
음반에서 파이스트는 프랜치팝과 포크락의 무드에 일렉트로닉하거나 어쿠스틱한 리듬들을 자유롭게 더하면서 예술적인 색채를 잡아내곤 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복고지향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도 없이 많은 퇴고를 거친 글처럼 군더더기가 없고 아름답게 농축된 느낌이 참 좋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녹녹하니 말랑한 팝음악을 할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예요. 우리나라 모 광고음악으로도 쓰였던 “Tout Doucement”만 들어본 분이라면 아파트나 냉장고 CF에 등장할 법한 재지(jazzy)한 팝뮤직을 생각하셨겠지만, 앨범 전체를 곰곰이 들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여러 라이브 무대에서 음반의 차분함을 벗어나 1970년대에 가까운 락큰롤 정서를 보여주었죠.
 
줄라이의 영화와 파이스트의 음악, 그녀들의 몸짓
 
저만의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는 미국의 독립영화감독인 미란다 줄라이(Miranda July)의 <미 앤 유 앤 에브리원>(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의 장면들에 흘러 들어가는 ‘음악 같지 않은’ 음악들을 들을 때면, 여지없이 파이스트 생각이 나요. (여기서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이란, 음악은 음악이되 인물들의 마음변화에 따라 음들이 떨궈지기에 마치 ‘기분들의 소리’ 같다는 의미입니다.)
 
▲ 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의 한 장면
우선 “Leisure Suite” 같은 곡이 그 영화의 테마음악들처럼 몽글몽글하게 굴러 나오는 신디사이저 음색을 사용한다는 데에서 기술적인 원인을 짚어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파이스트가 아니어도 이미 그런 곡들은 여기저기에 많이 존재하고 있으니 별로 적합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아요. 완결적인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사람 감정처럼 흐르는, ‘액체 같은’ 음악이라는 면에서는 파이스트의 음악도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전혀 손색없긴 하지만요.

 
저는 미란다 줄라이와 파이스트의 공통감각을 심리적인 표현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 있다가도 돌연 홀로 남은 듯한 기분이 들거나, 나와 사람들 사이에 얇은 막이 둘러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잖아요. 사회심리에서 여성의 고독을 그다지 명예로운 상태로 정의하지 않는 탓인지는 몰라도, 그럴 때면 여자들은 종종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거나 외로움에 사무치게 되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여건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파이스트의 음악을 들으면, 그런 순간조차 혼자만의 행성에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춤을 출 것 같은 한 여성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 사이 소음 속으로 돌아와서도 이내 상상력을 발휘하며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같고요. (그녀의 뮤직비디오 “I feel it all”, “Mushaboom”을 보신다면 저와 조금은 공감하실 수 있을까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에서 감독이 직접 연기한 ‘크리스틴’의 두 눈동자에는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도 가득하지만, 홀로 있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자신 마음과 대화해보려는 의지도 아주 강해요. 아마도 이런 모습에서 파이스트 음악과 그 영화의 교차지점을 생각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얼굴의 피부 밑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입술의 움직임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그 음악이 들려올 것 같은 저의 이 기분은 내면과의 소통을 말하는 듯한 그녀의 ‘음악하기’에서 불러일으켜집니다. 파이스트의 곡에는 무척 다양한 악기와 음악적 요소가 드나들지만 그것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 음악이 온전히 느껴질 것 같진 않은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겁니다.
 
자신의 마음과 마주해요
 
▲ 파이스트 [Open Season] 앨범재킷 2006
소통, 소통, 소통…. 정치적 행동의 장은 물론이요,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정말 자주 강조되는 말인데요. 이런 저런 소통의 미학을 선보이는 예술가들에게서 자신과의 대화가 너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을 보며, 저는 제 내면의 몇 가지 침묵들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도 더욱 감상적인 이번 글은 파이스트에 대한 정보전달이나 비평이 아니라, 공감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지치기 쉬운 여름 ‘그녀’와 귀중한 휴식의 시간들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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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3 [17:08] 수정 | 삭제
  • 와우.. 행사 준비로 여성 음악인들의 노래를 찾아보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다가, '맞아 일다에 연재되는 기사가 있었지!' 하며 들어왔어요. 개인적으로 파이스트 let it die 앨범을 즐겨 들었고, <미앤유앤에브리원>을 국내 개봉전부터 너무나 사랑해왔던터라 이 기사가 더 반갑고, 마음에 와닿고.. 하네요^^
  • ^^ 2008/08/12 [12:26] 수정 | 삭제
  •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영화를 놓친 걸 다시금 후회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TV에서 딱 방영해준 거 있죠. 이번엔 놓치지 않고 봤습니다! 기자님의 선견지명이었나요? ㅎㅎ
  • 땡스 2008/08/10 [13:06] 수정 | 삭제
  • 마침 휴간데,맞추서 소개해주시네요 고마워요 이 기사 읽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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