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개개인이 자율성과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현정 | 기사입력 2008/09/05 [17:45]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개개인이 자율성과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현정 | 입력 : 2008/09/05 [17:45]
많은 경우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병을 앓게 되기도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고 행한 일이 꼬여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직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심심할 만큼 평화로웠던 세상이 그토록 처절하게 두려워질 때도 없을 터입니다.
 
삶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나의 의지와 힘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무장해제의 경험. 삶을 자율에 의해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킵니다.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질 때, 과연 신을 원망하거나 비정한 세계에 적개심을 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한없이 비탄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 나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해
 
작은 부상으로 일부 신경을 다친 분들 중에, 직접적인 손상을 입지 않은 다른 신체부위 혹은 온몸까지 극심한 통증이 퍼지게 되는 분들을 자주 뵈었습니다. 바람이 살결을 스치기만 해도 끔찍한 통증을 느낀다고 하는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그런 고통이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통증에서 시작된 불면증이나 우울증으로 정신과 장면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심리적 스트레스에 시달리시는 분들을 뵙고 나니, 단지 통증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극한 통증에 대해 ‘아무 손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이 통증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중한 병을 진단받았을 때의 상황도 유사해 보입니다. 특히 원인이 모호하며 재발률이 높고,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은 병이 찾아왔을 때 홀로 심연으로 빠지는 듯 스미어 오는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고, 오직 의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때,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는 ‘내 의지는 무용지물’이라는 무력감에서 옵니다.
 
그래서 최대한 예후(豫後. 병의 경과와 결말을 아는 것)를 예측할 수 있고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 병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환자에게 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치료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약을 처방할 때에도 약의 원리를 충분히 설명해주어 ‘약에 종속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한 알 먹을 때에도 환자의 의지가 깃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무척 가치 있는 일입니다.
 
식이요법이나 운동, 생활습관 개선처럼 환자가 스스로 행하는 대책들이 병의 극복에 도움이 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한 대처법 자체의 치료원리가 도움을 주는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많은 부분은 스스로 병에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 내 힘과 의지로 나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 즉 자율성과 통제감이 치료효과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통증과 고통을 ‘관리’하는 능력, 통제력 키우기
 
자율성이란, 나의 마음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 의지와 연관시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허나 스스로 운명을 쥐락펴락하거나, 불행은 피해가고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전지전능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삶의 변화를 거뜬히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변화는 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며, 손을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명쾌하게 가리어 낼 수 있는 지혜로움입니다. 그리하여 통제감이란, 예상치 못한 고통 속에서도 힘껏 의지를 발휘하여 대처할 수 있다는, “이거 할만 하다”는 강한 믿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통증환자를 위한 심리치료적 접근방법은 통증을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언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다음에 언제 아플지를 예측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첫 번째 도전과제가 됩니다. 어떨 때에 아픈지를 알게 되면, 이에 대처하고 준비하기가 조금 더 낫습니다. 또 그 다음 번에는 과거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대처능력이 쌓여갑니다.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은 환자가 획득하는 힘의 기반이 됩니다. 속수무책으로 통증을 맞닥뜨릴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분들에게서는 심지어 통증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성숙한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만성적인 불안과 같은 격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심리치료도 통제력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에 휘둘리거나 압도되지 않은 채, 어떤 상황에서 힘이 드는지 자각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의 평안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면, 심지어 과거와 똑같은 고통스러움이 찾아와도 과거처럼 이에 동요하지 않게 됩니다. 동요하지 않은 채 고통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평온함은, 매우 성숙한 인간상에 가깝지요. 그만큼 자율성과 통제감이란 중요합니다.
 
무자비한 자본 앞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느끼는 무력감
 
▲ 서울역 철탑위 농성을 하고 있는 KTX승무원들 
한편, 우리는 자연섭리에 의해 깨닫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지혜롭게 해결하기도 전에,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체계에 의해 무릎 꿇어야 할 때에도 무척 많습니다. 신체를 돌보고 마음을 해치지 않고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요구가 비난을 받고, 저항할수록 권력관계를 악용하면서 사람의 삶을 뿌리 채 흔드는 행태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연섭리에는 의도가 없으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삶에 알량하게도 힘을 행사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심리적 고통에 관한 최근의 인터뷰들 중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감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무력감이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치료법이 없는 병에 맞서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삶의 권리를 주장하여도 이것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처벌받거나 외면당하는 현실은 몹시도 막중한 불안정감을 야기하기 마련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한 강한 분노감이 끝내 부정당했을 때 찾아오는 것은, 개인의 몸으로 막강한 권력체계 앞에 덩그라니 놓여있다는 무력감입니다. 거대 권력 앞에 홀로 놓인 개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믿음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사람은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위해 타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탈출구가 없다고 느끼는 절벽 끝에서 자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개인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개인에게 체계적으로 무력감을 조장하는 자본의 무자비함에 의해서입니다.
 
무력감은 타인이 공감해줄 때 사라진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한 무력감 속에서 자율성과 통제감을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요. 직업 만족도와 심리적 변인들 사이의 관련성을 주로 연구하는 커민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최근 연구에서, 구체적인 특정 사안마다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때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화되며, 이로써 직업 스트레스가 감소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실제로 자가치료나 통증관리 등에 앞서서도, 고통에 대한 무력감 그 자체를 타인에게 인정받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로는 무력감을 인정받게 되는 즉시 통제력이 저절로 커지기도 합니다. 인정받는다 함은, 운명을 그저 떠맡으라는 무책임함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는 때로 ‘그것도 못 이겨내냐’는 질책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통증으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리는 분들은 대체로 ‘무력해서는 안 되는 처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얼른 직장에 복귀해서 일을 하고 식구들을 책임져야 하는데,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니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또한 ‘이 통증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여있습니다. 대개 주변에서 “뭘 그런걸 가지고 아프다냐”는 반응에 자주 대면해야 했던 분들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무력감은 절망감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인정받은 무력감은 더욱 다부진 의지를 선사합니다. 인정받는다 함은, 그 무력감을 공감 받는 데서 시작합니다. 커민스가 중요하게 보았던 사회적 지지는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고통스러웠으며 그 고통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힘에 부쳤다라고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 있는 것, 누군가가 진심으로 그 고통에 공감하며 그러나 당신의 대항은 진정 의지에 차있었고 헛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것 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험난한 길 앞에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무력감을 나눌 때, 우리는 의지가 있고 자율적인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무력감을 질책하는 마음은 미루어두고, 아주 충분히 무력감에 잠기십시오. 등을 어루만지는 동료의 손길에 기댄 채 한없이 무력해지십시오. 무력감을 조장하는 의도 앞에 무력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나의 무력감을 인정해주고 신뢰하는 동료가 공감해줄 때 무력감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본연의 신념과 의지가 번뜩이듯 되돌아 올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자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심리학에는 ‘통제 소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데요. 자기 뜻과 의지에 의해서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적 통제 소재’라 하고, 권력을 가진 타인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생각은 ‘외부 통제 소재’라 합니다.
 
‘내적 통제 소재’를 가진 이들이 심리적으로 더 건강하다는 오래된 결과들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자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부 통제 소재’의 입장에 더 가까운데, 이들이 사회적으로 더 활발히 활동한다는 건 틀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레빈슨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외부 통제 소재’를 지닌 사람들이 그럼에도 더 의지적인 데에는, 그 사회적 신념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무력해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무력해졌던 바 있음에도 또다시 싸우고 있는 분들은, 중한 신체적 질환과 더불어서 산다는 분들만큼이나 강인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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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9/05/20 [16:19] 수정 | 삭제
  •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 밀양 관련글 읽다가 어찌어찌 들어오게 되었는데, 일다네요.
    현실에서 엄청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황당무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어쩐지 위안이 되는 글입니다.^^
  • 숨애 2008/09/08 [02:43] 수정 | 삭제
  • 이 마음이야기들 정말 좋아합니다. 개인적인 느낌과 감정을 통해 사회적인 것들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시선을 자연스레 옮겨 주시니 감사해요. 넘쳐나는 감정과 느낌으로 저는 가끔 제 자신을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이어서 문제라고 생각하곤 했었는데요, 최현정님의 글을 통해 이런 저의 모습도 사회에(남성적인)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나 하고 자신이 생기고 있습니다. 글들 감사드립니다.
  • 최희정 2008/09/07 [00:06] 수정 | 삭제
  • 최현정님 기사 잘 읽었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던 것을 기사로 다루셨네요. 감사합니다. 무력감과 우울감을 연결시킬수도 있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곱씹어 생각해보렵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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