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눈이 엄청나게 쌓인 하천변을 서둘러 나가 본 것은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이후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길을 걸어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더욱 설레고 들뜨고 했다.
그러다 문득, 눈싸움을 하자고 졸랐던 원영이 생각이 났다. 작년 겨울, “선생님! 눈이 저렇게 많이 왔는데, 눈싸움은 하셨어요?” 원영이는 들어서자마자 내게 물었다. “눈싸움? 아니!” 그 대답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눈싸움을 못하셨다니! 그럼, 있다가 공부 끝나고 우리 눈싸움하러 가요.” “…….” 거기에 별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재차 대답을 요구했고, 너무 심하게 조르는가 싶어 딱 잘라 안 한다고 거절했더니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눈싸움은 어렸을 때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눈을 꽁꽁 뭉쳐서는 앞서 걷고 있던 함께 산책 나온 친구의 등에 화-악하고 던져 보았다. 친구의 등에서 눈이 터진다. 그런데 그녀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내게 눈을 던질 생각을 않는 거다. 다시 한 번 눈을 뭉쳐 던졌지만, 여전히 되받아 주지 않는 시큰둥한 반응에 흥이 빠지고 말았다. 원영이도 이랬겠구나, 그녀의 마음이 절로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눈을 던지면서 흥분된 기운이 갑자기 가슴에서 얼굴로 확 솟아오르는 걸 느꼈는데, 눈싸움이 얼마나 짜릿한 에너지를 주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아이들은 이렇듯 내가 모르는, 혹은 잊고 있던 동심을 일깨운다. 한때, 우리 집 한 켠에 있었던 비밀방도 꼭 그랬다. 태림이와 미나는 특히 그 비밀방을 좋아했던 아이들이다. 당시 2학년이었던 그들은 꼭 수업 전 10분에서 20분 정도 빨리 와 비밀방에서 놀곤 했다. ‘비밀방’은 거실 한 귀퉁이에 책꽂이를 칸막이로 해 만든, 숨은 작은 공간이었는데 처음 비밀방 만드는 걸 보고 제일 흥미를 보인 이들도 바로 2학년 아이들이었다. 언제 다 완성되느냐, 여기서 뭘 할 거냐, 빨리 보고 싶다는 등 수없이 많은 비밀방에 대한 호기심을 쏟아놓았다. 그리고 그 방이 완성된 다음엔 일찍 와 얼마간이나마 그곳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도리어 고학년 아이들은 비밀방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 비밀방을 뭐하게요?” “… 재밌잖아!” 질문한 아이들은 내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자주 지었었다. 또 책꽂이 위에 있는 두꺼비의 경우도 그렇다. 그것은 몇 해 전 한 친구가 태국에 다녀오면서 사다 준 건데, 두꺼비에 꽂혀 있는 나무 막대기로 등을 긁으면 “꾸억꾸억” 두꺼비 울음소리를 낸다. 아이들은 그것을 긁는 것도 참 좋아한다. 한번은 준영이가 공부방에 들어서자마자 항상 긁던 두꺼비의 등을, 그날은 긁지도 않고 까치발을 띄어 아이들 손이 잘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놓으며, “선생님, 오늘은 얘들 두꺼비 긁지 못하게 하세요! 내일 현장학습 가거든요.” 한다. 내가 두꺼비 긁는 걸 멈추지 않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이 긁으면 안돼! 그 소리는 비를 부르거든.” 했더니, 믿거나 말거나 한 그 말을 새겨듣고는 천진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참을 미소 지으며 바라봤던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내게 아이들은 잊고 있던, 또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는 천진함을 되찾게 해주는 존재다. 난 이들을 통해 내가 나이가 참 많은 어른이라는 걸 자주자주 잊는다. 지금은 함께 공부하지 않는 원영이를 길에서라도 우연히 보게 되면, 나도 눈싸움을 해보았고 눈싸움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이젠 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을 듣고, 그럼 당장 눈싸움을 하자고 제안한다면 그 때는 눈싸움을 할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안 한다고 하겠지. 그런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잘 통하지 않는 고리타분한 어른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 교육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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