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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든 열심히 살면 되지”
반백의 모범운전사 최인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윤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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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운전기사 최인심(67)씨    © 일다
늦은 새벽에 잡아탄 택시. 목적지를 말했더니 앞에서 기사가 뭐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네,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되물어보진 않았다. 때론 기사들이 쓸데없는 농담도 하니까, 때론 그런 농담 몇 마디 받아주다가 기운이 쏙 빠질 때도 있었으니까.
“같은 동네 산다구요!”
손님이 별다른 대답이 없자,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하는 기사.
“네? 아, 네.”

 
그러고 보니, 기사가 여자분이다. 그것도 백발이 성성하다. 움츠렸던 마음이 풀어져서 “요즘 같은 때 새벽에 여자기사님 뵈니까 반갑네요.” 했더니 “그래요? 감사합니다.”라고 깍듯이 대답을 하신다. 핸들을 돌려 유유히 운전하며 손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친절한 자태. ‘인터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리면서 꼭 한번 연락 드리겠노라 말씀 드렸다.
 
자립을 위해 선택한 기사생활 37년
 
“난 정말 전화가 올 줄 몰랐어요.”
 
며칠 뒤 쉬는 날 다시 만났더니, 최인심 기사는 만나자마자 그런다. 가끔 공치사하는 손님들을 더러 만나서 “연락하겠다”는 말은 잘 안 믿었다고. 심지어 차비가 없다며 “꼭 온라인계좌로 부치겠다”고 몇 번 약속을 하고 내린 손님들도 태반 연락도 없고, 차비도 안 부친다는데…. “근래에도 차비 안내고 내린 경우가 세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72년부터 택시”를 몰았다. 서른 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했으니까 택시운전을 한 지 올해로 37년째다. “그때는 (택시기사로) 여자를 잘 안 써줬죠. 마침 고향아저씨인 사장님을 만나서 했지. 그 집만 여자운전자 6명 썼어요.”
 
최인심씨가 택시기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는 운전을 하는 것은 “기술직”에 속했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오래 전에 결혼하려고 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성사되진 못했다. 그 후론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려고” 마음먹었다. “혼자 살려고 하니까 기술직이라도 있어야, 남들이 보기에 측은하게 안 보이고 싶어서”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했다.
 
기부와 봉사활동 죽을 때까지 할 것
 
▲  봉사활동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 일다
1983년도부터는 개인택시 운전을 했다. 그리고 1979년부터 종로경찰서 모범운전사로 자원봉사생활을 시작했다. “오늘 인터뷰한다고 해서 자원봉사 하면서 받은 상을 세어보니 12개가 되더군요.”

 
그는 무척 수줍어하면서 그간의 활동에 대해 소개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갔던 거리질서캠페인, 볼펜이나 껌을 팔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매달 8,9만원 갖다 주기도 했고, 장애인들을 모시고 갔다가 오기도 하고.” 또, 그는 침술을 배웠던 적이 있다. 지금은 양로원에 들러 할머니들 건강을 돌봐주기도 한다.
 
“저는요. 죽을 때까지 봉사할 거에요. 앞으로는 동네할머니들한테 더 잘할 거에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동네 사회복지시설에 기부를 해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그 돈이 안 온다’는 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핑계로 기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은 쌀과 같은 현물로 기부하고, 한 달에 한번씩 “노인들이 잡숫고 싶다는 메뉴로 점심을 산다.”
 
“아저씨, 여자운전수라고 무시하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한숨을 쉴 만큼 그는 젊은 날 고생이 많았다. 열일곱 살 남짓 되었을 때 “집안이 망해서 외삼촌 집에 식모살이 하라”고 어머니가 서울로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 후로 호떡장사도 해보고, 신문팔이도 해보고, 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최인심씨는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자립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으면 싶다는 노파심을 드러냈다.
 
“가끔 그런 사람들 만나면 저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대학 나와서 이런 일하면 창피하잖아요’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창피해할 거 없어요. 또 돈이 작으면 어때요. 아무 거나 해서 열심히 살면 되지.”
 
올해로 나이가 예순일곱인 그는 “죽을 때까지 봉사할” 예정이고, 힘닿는 데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지금도 새벽까지 운전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여자라고 우습게 보고” 막말을 하는 손님도 더러 있다고.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손님에게 얻어터진 게” 세 번이나 된다니, 충격적이다.
 
“욕하는 게 제일 속상하지.”

며칠 전에도 욕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저씨, 여자운전수라고 무시하죠? 저는 아저씨처럼 안하무인으로 안 살아요.”라고 응대해줬다. 그러면서도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 거고요. 근데 특별하게 잘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만났어요. 너무너무 고맙죠.”라며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씩 꼽아가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옛 친구를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
 
▲ 옛 친구 안명란씨를 찾고 싶다고.  © 일다
사실 최인심 기사가 휴일 귀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인터뷰를 하면 혹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친구를 한 사람 찾고 싶어요. 60년대에 만났던 친구인데, 걔를 꼭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서 절박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1959년에 서울로 올라왔을 당시에 최인심(당시 예명은 최영미)씨에게 도움을 많이 줬던 사람이라고 한다. 이름은 안명란. 당시 “마포구 도화2동에 살다가 1964년도에 왕십리로 이사 간” 것이 그가 아는 전부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으니까 지금 예순여덟이나 아홉쯤 됐을 것에요. 걔네 집에서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내 생활이 펴지면 연락을 해야겠다고 미루다가 그 후 인연이 끊어져서, 찾을 길이 없는 거에요.”
 
그 얘기를 하면서 최인심 기사는 눈물까지 비쳤다. 사정이 어려울 때 도와줬던 친구, 그 빚을 꼭 갚고 싶었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으면서, 옛 친구를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해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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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2/23 [04:04]  최종편집: ⓒ 일다
 
g 09/02/23 [13:38] 수정 삭제  
  그 시절에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할머니라니, 멋져요~
직업의 귀천 없이 열심히 살면 된다는 얘기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사회적인 편견 같은 것도 많이 시달리셨을 것 같은데,
열심히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생각에 따뜻해지네요.
inred 09/02/24 [14:39] 수정 삭제  
  만남 이후의 이야기도 들려주심 좋겠네요. ^^
inred 09/02/24 [14:48] 수정 삭제  
  지금도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인데, 70-80년대를 싱글로 살아오신 분들은 많은 난관이 있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 기술직을 택하셨다는 얘기, 이제야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중이에요.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부엉이 09/02/24 [16:38] 수정 삭제  
  그 연세의 한국 여성이 홀로 경제적 자립을 하고 그것도 남성들의 영역 이다시피한 택시기사를 그렇게 오래하시며 살아오신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친구분도 꼭 찾으시기 바래요
로마 09/02/26 [14:57] 수정 삭제  
  최인심님 가슴이 훈훈해지네요. 제게 힘이 됩니다.
날자 09/03/02 [10:31] 수정 삭제  
  이 글을 읽으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제게 닥친 어려움이 아주 작게만 느껴지네요.
힘을 얻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분..꼭 찾으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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