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갇히지 않는 나이 듦

다양한 ‘나’를 찾아서

이경신 | 기사입력 2009/03/23 [09:19]

나이에 갇히지 않는 나이 듦

다양한 ‘나’를 찾아서

이경신 | 입력 : 2009/03/23 [09:19]
밸리댄스를 다시 시작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아직도 첫 수업에 들어가서 당황했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첫날, 교실에 귀여운 꼬마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난 교실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꼬마들이 바로 밸리수업을 함께 받을 학생들이었다. 나 같은 어른 수강생은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인 어린이들이었으며, 심지어 여섯 살 난 꼬마도 둘이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수업은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지나온 세월의 ‘나’를 담고 있는 현재의 나
 
밸리댄스와의 인연은 작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밸리댄스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를 드러낸 채 화려한 옷차림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TV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남의 일로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밸리댄스를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몇 번의 우연 덕분이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설사와 구토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이후 겨우내 위염과 장염에 시달리던 중 밸리댄스가 장운동에 좋다는 정보를 얻었고, 마침 일터 근처 헬스장에 밸리댄스 저녁수업이 생겼고…. 그렇게 시작한 밸리댄스는 평소와 다른 몸놀림에 대한 신선한 체험을 안겨 주었다. 음악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것도 색다른, 아니 잊고 있었던 즐거움이었다.
 
▲ 사노 요코의 그림책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중에서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잊어가는 것들이 생겨난 듯 하다. 난 어린 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내 모습은 나의 다른 모습에 가려져 내 속에서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숨어 있던 어린 나를 밸리댄스를 통해 다시 발견해낸 것은 삶의 또 다른 힘이 되었다.

 
내가 노년에 이르게 된다고 해도, 아기인 나, 어린이인 나, 학생인 나, 젊은 나, 중년인 나… 이 모든 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노년 속에는 지나온 세월 속의 모든 ‘나’가 고스란히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그 다양한 나 가운데 어떤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나는 내 속에서 작아져 있을 뿐이다. 과거의 다양한 내가 현재의 삶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다면, 내 삶은 더욱 풍부해지고 건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살아 있는 한 ‘나’는 변화하고 성장해야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놓치는 것은 지난 시간에서 퍼 올린 나만은 아니다. 앞으로 등장하려는 나 역시도 그대로 잠재워버리기 일쑤다. 나이가 들수록 몸도 더 쇠약해지고 질병에도 더 취약해져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삶에 대한 열정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욕구까지도 줄어들고 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
 
몇 년 전 아파트 주민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봤는데, 그 카페에 노인 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노인정을 방문해 카페이용법을 알려드린 적이 있었다. 미리 공지를 했지만, 실제 노인정에 모인 분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또 그분들 가운데서도 할머니 단 한 분만이 배우려고 애쓰셨고, 나머지 분들은 “난 못해”하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것을 만나길 거부하는 태도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삶에 대한 열정과 배움의 의지를 통해 잠재되어 있는 나를 끊임없이 깨워낼 수 있는 힘이 우리 속에는 있다고 본다.
 
내 경우, 어린 시절 해내지 못한 자전거타기를 서른이 넘어 배웠고, 후배의 할머니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영어, 일어공부를 하는 열성을 보이셨다고 한다. 또 친구어머니는 예순이 넘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셨는데, 수영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얼마 전 “이제, 영어를 배워볼까” 하며 새로운 포부를 밝히셨다. 우리 주변에는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가고, 청소년기에 끝내지 못한 공부를 중년에 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으며, 노년이 되어서 새로운 세상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지금껏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나를 계속해서 낳으면서 장차 태어날, 또 다른 나를 부푼 마음으로 기대할 때 삶의 활기는 유지된다. 나는 살아 있는 한,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다양한 ‘나’인 것이다.
 
오늘도 난 여섯 살 꼬마들을 포함한 귀여운 어린 친구들, 그 친구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 그리고 오늘 처음 수업에 참여한 오십 대 아주머니와 함께 즐겁게 밸리댄스를 추고 왔다. 밸리댄스를 하는 동안, 우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함께 춤을 추는 친구들일 뿐이다.
 
뒤늦게 시작한 밸리댄스이지만,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는 사람들 앞에 이 춤을 멋지게 선보이고 있지 않을까? 또, 어린 시절 꿈꾸었던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느라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있을 수도 있고, 수없이 생각했다 접었다 하는 시골 삶을 찾아 어느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늙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내가 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읽자. 사노 요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언어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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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리브 2009/03/25 [12:14] 수정 | 삭제
  • 왜 배운다는 게 어린시절에만 해당한다는 인식을 갖게된 걸까요...
    서른을 넘었을 뿐인데, 지금 뭘 배운다는 게 어려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어린 시절만 배우는 시기가 아닌데 말이죠..
    더 나이 들어서도 첫발을 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기꺼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