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아열대의 땅, 그리고 매컹
라오스 최대의 수출품인 전기도 매컹이 있기에 가능한 수력발전으로부터 나온다. 매컹은 라오스의 북서부, 버마(미얀마)와 타이의 마약 재배로 유명한 골든 트라이앵글로부터 시작해 내가 살았던 싸이냐부리 지역과 남서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내내 라오스와 타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이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꼭 같다. 나라 생김새도 남북으로 길다. 크기도 한반도보다 조금 큰 정도로 비슷하고, 옛날엔 중국, 베트남과 교류할 수 없게 했던, 북동쪽이 아주 높은 산지인 것도 같다. 국립박물관에서 본 라오스 광물분포도 역시 종류는 거의 없는 게 없이 다양하지만, 정작 석유도 없고 경제성도 없는(라오스는 발굴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실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와 비슷했다. 콩고가 아닌 라오스로 가게 된 나를 위로해 국내훈련소장이 라오스를 일러 한 말이 있다. “70년대 우리 시골 같은 그런 느낌이래요.” 정말 그랬다. 특히나 이국적인 야자수를 뺀다면 논과 밭이 많은 라오스의 시골 풍경은 영락없이 같았다. 코끼리의 영광과 슬픈 전쟁의 역사
“타이 인구의 3,40 퍼센트 정도가 라오족이에요.” 전체 인구로 타이가 6천500만, 라오스가 650만이니, 단순하게만 따져도 타이에 라오족이 오히려 더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라오족이 아니더라도 타이어와 라오스어는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다. 정식 명칭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간단하게는 197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수립되었다라고 기술된다. 그러나 나는 보다 길게, 지금의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의 오랜 독립투쟁과 이후 베트남전쟁기간 동안 미국이 벌인 일방적인 비밀전쟁(호치민루트를 차단할 목적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이 라오스의 영토를 폭격한 것으로 시작된 전쟁. 지금까지도 미국은 이를 부정하고 있어 비밀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의 폐허 위에 가까스로 수립한 독립국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가 지금의 라오스에 얼마나 큰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 말이다. 베트남에 비해 훨씬 덜한 것 같으나, 식민제국으로서 프랑스가 라오스에 미친 영향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단적으로 1990년대 후반까지도 라오스는 제2외국어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한국전쟁기간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의 몇 배에 이르는 양이 비밀전쟁기간 하루마다 라오스 동부에 쏟아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된 씨엥쿠왕(라오스의 북동부 지역) 풍경이 아니더라도, 풀 한 포기 없이 초토화되었을 참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쟁지역이 아님에도 인구 구성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북서부 싸이냐부리 지역 교사들을 보면, 특히 내가 파견된 믿따팝(우정) 중학교를 보면, 내 또래인 30대 중반이 아예 빈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피해가 누적된 전쟁의 말미는 아기를 낳을 수조차 없을 만큼 라오스 전체가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현지훈련 동안 우리에게 라오스어를 가르쳐주신 국립대학 교수님 중 한 분이 북동부 출신이었다. 쉰을 바라보는 교수님은 눈앞에서 어머니를 앗아간 미국의 폭격 참상을 이야기하며 여덟 살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라오스에서 보는 사회주의, 그리고 공동체 2년 동안 라오스에 살면서 다행히 병원 신세를 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병원은 자주 가봤다. 함께 파견된 동료나 선생님들, 이웃들이 아파서, 또는 단순히 현지 주요기관 조사를 위해서. 지난 ‘착한 여행’에서 또 한번 라오스의 병원을 경험했다. 여행에 참여한 한 어린이가 하노이 공항에서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마침 탑승시간이 된 라오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루앙파방 병원 응급실로 갔다.
라오스의 ‘무상의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년 믿따팝 중학교에 파견되어 있으면서 큰 수술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오토바이 사고로 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져 싸이냐부리 도립병원에서 1차 치료를 하고, 다시 수도 위양짠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했던 경우. 또 한 번은 결혼 후 아기가 없고 생리통이 극심해 처음부터 위양짠의 모자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양쪽 나팔관과 난소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경우. 두 분 모두 우리 학교 선생님이었다. 수술 후 남편들이 몇 장의 서류를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재직증명서 같은 것을 떼 갔다. 교장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저 서류들을 어디에 쓰는지. 병원비를 환급 받기 위해서란다. 환자가 소속된, 또는 환자 직계가족이 소속된 기관에서 경우에 따라 병원비의 50퍼센트 정도를 보조한단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인민 대부분이 당원이자 공무원인 라오스 사람들. 몇 장의 서류가 말해 주듯이 보통 환자들이 소속된 단체나 기관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의료비를 보조 받을 수도, 오히려 초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라오스에서는 자연스레 닮아갔다. 선생님들이 돈을 모을 때마다 나와 동료들도 100달러씩을 모아 냈다. 이번 착한 여행에 덤으로 주어진 ‘고향방문’ 때, 마침 아짠 팓따니(정강이와 골반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던 선생님)가 정강이에 넣었던 철심을 빼는 마지막 수술을 받았다. 넷이 아닌 혼자로 조금 벅찼지만, 이번에도 나는 당연히 부조를 했다. 거친 실밥자국을 만져보며 염려하는 내 손을 팓따니가 오히려 언니처럼 쥐고 안심시켰다. 고맙다. 가족, 공동체라는 말의 뜻을 이보다 선명하게 나에게 가르쳐 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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