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묻혀져 있던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농사이야기, 환경이야기, 먹거리이야기, 농부로 살아오면서 겪은 여성들 삶의 이야기를 통해, 녹색미래의 대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농업과 생태감수성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도-농 격차와 여성농민이 겪는 차별과 소외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첫 연재기사로 경상북도 상주에서 19년째 무농약농사를 지어온 김정열님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대체농법도 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유기농업
이웃에 1970년대부터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던 고집불통 농민이 한 분 계셨습니다. 신접살림을 차리고 농사를 처음 짓던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인데, 그 분의 권유로 처음부터 농약을 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참 무모했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그랬을까요? 지금은 우렁이농법이니 오리농법이니 해서 논에 제초할 여러 가지 방법도 있고, 흙살림이나 유기농협회 등 여러 연구기관들이 있어서 유기농업을 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때는 농약을 안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농약을 안 쳤다고 해서, 시골의 한 젊은이가 그걸 광고하여 쌀을 팔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논의 제초는 오직 우리 부부의 두 손으로 다 했습니다. 쌀의 일부는 운 좋게 조금 비싸게 팔 수도 있었지만, 병충해는 속수무책으로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농사짓느라고 힘들었던 이야기만 해도 몇 날은 걸릴 것 같습니다. 풀을 뽑느라 하도 힘을 써서 손목이 아파 칼질을 할 수조차 없어 밥을 못해 먹던 일, 애들 셋 키우면서도 농사일은 해야 했기에 집으로 들로 쫓아다니던 일, 논에 풀이 많아 콤바인 작업을 못하고 결국은 수확을 포기했던 일, 배 복숭아 포도농사를 무농약으로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빚만 남았던 일…. 당시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생산한 먹거리에 대한 애정 처음에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시작한 건 남편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농약도 치고 비료도 많이 해서 농사로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둘 다 빈털터리로 결혼해서 남의 집 옆방에서 시작한 살림이었기에, 농사를 열심히 지어 집 한 칸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혼자 농약통 짊어지고 칠 배포는 없었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정도는 제초제를 쳤습니다. 둘 다 농사일이 서툰데다가, 저는 애들 키우느라 농사일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하게 되자, 도저히 풀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남의 품을 살 만큼의 돈도 없었거니와, 돈으로 남의 노동력을 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줄도 몰랐습니다. 오직 둘이 일하는 것밖에는 몰랐습니다. 두 사람의 일손으로는 도저히 풀을 감당하지 못해, 애써 지은 농사를 수확도 하지 못하는 논밭이 생기고 하자, 제가 성화를 하여 결국 제초제를 쳤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이 사람에게 해롭다고 하니 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해로운 것을 치는 것은, 돈은 될지 몰라도 양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적으로 농사짓는 내가 떳떳하다는 자부심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짓는 내 먹거리에 대해 애정이 생겼습니다. 내가 농사 짓는 쌀, 배추, 고추, 오이가 관행농업으로 농사짓는 것들에 비해 안전하고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봄부터 열심히 일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다 생명농업으로 짓기 위해 부지런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습니다. 내가 심은 상추로 쌈 싸 먹는 것이 좋았고, 내가 가꾼 배추로 담은 김치가 참 맛있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나를 위하여, 내 아이들의 먹을 거리를 위해서 생명농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웃이 생기고, 농민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동네에는 ‘분회’라는 마을단위 조직이 있습니다. 매월 모여 회의도 하고(벌써 100차 회의가 넘었습니다), 힘든 일은 품앗이하고, 자매 결연한 소비자 조직과 손모내기 행사, 가을걷이 한마당 행사 등도 같이 합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신이 났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발 밑에서, 내 손에서 ‘살아있는 땅’ 요즘은 제가 농사짓고 있는 터전인 “땅”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처음엔 땅이 무생물인줄 알았습니다. 땅이 살아있는 것이라는 것, 땅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는 것은 양심에 거슬리는 일이었기 때문이지, 고백하건대 땅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깊어지니, 땅도 그냥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땅은 나와 함께 살아 숨쉬는 것이라는 걸 새록새록 느낍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하면 땅이 몸살을 한다는 것, 비닐을 씌우면 숨을 못 쉬어 답답해하니 내가 좀 고생스러워도 땅을 살리는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땅은 내 발 밑에서 내 손에서 살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농사일 중에서 호미로 밭 매는 일, 손으로 논에 풀 매는 일을 제일 좋아합니다. 땅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땅의 신선한 기운을 느끼며 흙을 만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저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하지 않는 유기농업으로 논 1만2천평, 밭 600평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농민으로, 여성농민으로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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