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30대의 나이에 80년대 학번이고 60년대생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시대와 나이와 학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용어이니만큼 별로 좋은 표현이라 할 수 없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사장될 용어라 생각한다. 다만, ‘386’이 과거 암울했던 시기 사회변혁을 부르짖었던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젠 정치적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력들을 흔히 통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용어를 빌어오기로 한다.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대학의 젊은 여성들, 혹은 여성운동권들 사이에선 ‘여성386은 어디에 있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됐었다. 각종 신문이며 TV에서 소위 ‘386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그러나 그 인사들 중에 ‘여성’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언론이 ‘386’의 현재 위치를 조명했을 때에도 카메라에 잡힐 만한 인물들은 거의 다 남성이었다. ‘386’이 곧 남성들을 지칭한다는 것은 19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 영화 <박하사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억압과 투쟁과 좌절과 타협으로 점철된 시대적 아픔을 겪어낸 이들은 전부 남성이며, 여성들은 단지 그들의 ‘첫사랑’이거나 ‘성매매 대상’이거나 혹은 ‘아내’로서만 존재했다. 존재했으나 잊혀진 이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성386은 존재했다. 다만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사라진' 여성386들을 수소문했다. 당시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왜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의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이런 질문에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답변을 해 줄 취재원을 찾은 것은 몇 주 전의 일이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간 연대조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폈고 졸업 후 기성 운동조직에 몸 담았었던 정모씨. 정씨는 인터뷰에 앞서, 자신 뿐 아니라 당시 활약했던 여성386들의 삶을 함께 돌아보며,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평가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씨와의 인터뷰는 “존재했으나 잊혀진 ‘여성386’들의 삶에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운동판의 남성 패거리 짓기 “당시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운동의 성격 자체가 여성배제적이었던 것 같아요. 꽃병(화염병) 던지는 전투조가 앞장을 서고, 여자들은 뒤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남학생들에게 꽃병이나 벽돌을 깨서 날라다 주었죠. 선봉에 서는 이들은 언제나 남학생들이었는데 투쟁의 양식이 워낙 폭력적이고 남자들에게 유리한 방식들이었어요. 군인들처럼 잘 달리고, 힘이 세고, 화염병 잘 던지는 게 필요했죠.” 대학운동사회의 지도부들 역시 남성들이 장악을 했다. 남녀공학의 경우 총학생회장단뿐 아니라 투쟁국장, 총무부장, 기획부장 대부분 남학생들로 구성됐다. 여학생들은 학술부장, 문화부장을 맡았다. 전대협(한총련의 모체) 집회 등 대단위 집회에선 사회를 보는 이들도 모두 남성이었다. 정씨는 대학 4학년 때부터 학간 연대조직에 들어가 일했기 때문에 지도그룹들과 만날 기회 많았다고 했다. 그들은 다 남자들로 구성돼있었다. 소수의 여자들이 문화부에 소속돼있었을 뿐이다. 큰 행사 운영은 물론, 대학 동아리조직 등 작은 단위들 조차도 지도그룹은 남자가 80~90% 장악했다. 그렇다고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수가 적었는가 하면 당치않다. 남성들의 수 못지 않았고,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이들도 많았다. “사회로 진출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배제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시민운동으로 나아갈 때, 남자들끼리 모여 뭔가를 궁리하기 시작한 거죠. 패거리 짓기의 시작인 셈인데 능력 있던 여자선배들은 거의 제외됐어요. 단체, 연구소 등 조직이 만들어질 때 그룹의 남성들끼리만 주도를 한 거죠. 내가 활동했던 문학운동판에서도 30대 중반까지의 젊은 여자 선배들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기성 문학운동단체(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의 남자들은 남자후배들만 끌어줬죠.” 산산이 부서진 꿈 혹은 대단한 착각 그렇다면 활동의 모델이 되어줄 만한 여자선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답은 정씨의 인생경로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답은? 아마도 남성386의 ‘인생경로’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을 ‘결혼’이다. 학생문학연대조직에서 일하던 정씨는 당시만 해도 ‘동등하게’ 활동을 해왔던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바뀐 게 뭔지 아세요? 이름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정00란 이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누구 부인’으로 불리게 됐어요. 결혼 전엔 동료였는데 말이에요. 내 남편을 ‘형’이라 부르던 이들은 나를 ‘형수’라고 부르게 되는 식이죠. 점차 조직에서 내 자리도 없어졌고 집안에 틀어박히게 됐어요. 반면 남편은 그 대단했던 조직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아 활동을 계속해나갔죠.” 정씨는 ‘남편과 부인은 일심동체’ ‘남편이 내 몫까지 밖에서 일한다’ ‘나의 일-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서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운동이다’라는 기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모 조직 문화부 간부수련회를 우리 집에서 했어요. 그 때 난 밥해줬어요. 항일무장투쟁처럼 보급투쟁을 한 셈이죠. 정말 고마운 맘으로 정성을 다해서 했다니까요. 그것밖에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거에요.” 그러나 세뇌를 하면서 자기위안을 삼기엔 현실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정씨는 자신이 남편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건강한 활동가’이기 때문이라 했다. “내 운동에 도움이 될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나의 운동을 빛나게 해 줄 조력자로 선택한 거예요. 산산이 부서진 꿈이었죠.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정씨는 결혼과 더불어 시댁의 경조사를 다 도맡게 되었고, 남편을 변호하고 커버해주고, 그의 모든 것을 다 챙겼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양육에 매달렸다. “한 번은 남편의 여성동료가 집에 온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말하길 ‘다들 언니 칭찬을 해요. 가난하고 너무 힘든 상황인데도 선배(남편) 일을 하게 배려해주고, 조용하게 사는 거 보면서 후배들이 훌륭하다고 말해요’ 하는 거예요. 내가 그랬죠. 아니라고. ‘남편 일이 곧 나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남편의 운동은 남편의 운동일 뿐이고 남편 인생과 내 인생이 같이 있지 않다는 걸 매일 피부 깊숙이 느끼면서 산다’고. ‘그래서 너무나 힘들다’고.” 정씨는 “남편이 날 억압하면서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는 식이었죠. 그렇지만 자기 운동의 시간을 나눌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여자 희생 위에 선 남성386들 정씨는 주위 다른 여성활동가들의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줬다. 무엇보다 자신은 ‘옥바라지’를 안 한 게 천만다행이라 했다. 너무 많은 결혼한 여성활동가들이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는 것으로 젊은 세월을 보냈으니 말이다. “지금은 유명인사가 된 남자와 결혼한 선배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엔 동등하게 일했다고 볼 수 있어요. 서로 감옥살이할 때 옥바라지도 돌아가면서 했으니까. 그러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문학예술청년단체를 크게 만들었죠. 물론 돈은 한 푼도 못 벌었고 오히려 있는 돈을 조직에 가져다 썼죠. 그 선배는 어떻게 됐겠어요? 가정경제 꾸리느라 시어머니와 애기옷 장사했어요." 현재 잘 나가는 모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남성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과외며 입시학원이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는 친구 이야기, 연구소를 차리고 이를 기반으로 경력을 쌓아 온 남편과 그의 뒤에서 운전연수를 하며 가족생계를 꾸려갔던 부인의 이야기… ‘여자 희생 위에 선 남성386’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운동권 여성이 비운동권 남성과 만나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당시 여성들이 ‘비혼’을 택하는 일 역시 매우 드물었다. 즉, 많은 경우 여성386들은 남성386의 뒤에서 헌신하며 가리워진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386의 삶, 개인의 일 아니다 정씨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혼 후에야 정씨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이게 내 개인의 일인가’ 반문도 해보았다. 개인의 문제라 생각하려니 너무나 억울한 것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정씨가 선뜻 인터뷰에 응한 것도 자신의 삶, 그리고 사라진 여성386들의 삶을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라보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고 나니 나 자신이 잘 보이더군요. 결혼 이후 내가 겪었던 일들이 과연 나만의 문제였나,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정리해서 얘기할 수준은 아니지만 분명히 대한민국 여성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죠.” 정씨는 최근 한 친구의 이혼소식을 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 공장에 취업해 파업을 주도했던, 훌륭한 노동운동가였던 그 친구는 결혼과 동시에 인생이 ‘찌그러졌다’고 했다. 친구는 병들어 누운 시아버지 병수발을 들었고 아들 둘의 양육을 도맡았다. 친구의 남편은 내놓으라 하는 마초였다는데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두 사람이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10년간 참고 또 참으면서 살았던 친구인데 어떤 경위로 이혼을 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남편 보기도 싫고 답답하게 사는 친구의 모습도 보기 싫어 연락 안 한지 꽤 됐는데, 조만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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