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의 성장은 가부장의 살해(혹은 죽음)과 그 뒤를 따르기 위해 습득해야 하는 남성적 기질 및 행동의 습득으로 그려진다. 프로이트가 고안한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이 같은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한 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와 힘을 모방하며 자라나게 된다. 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가부장제 위계구조는 아들들을 또 다른 가부장으로 키워내 그 구조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여자의 성장은 어떨까? 가족 안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보고 배울 모델이 없다. 단지 자라나면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암시만이 있을 뿐이다. 그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혹은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의 수직적인 위계구조와는 다른 관계망을 발달시킨다(친구와의 긴밀한 관계가 예가 될 수 있겠다). 여성들이 발달시키는 그 같은 관계망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보다 '관계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관계지향적'이라는 형용사는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습득해야 하는 일종의 '여성성'을 지칭하는 평가적인 개념인 동시에, 수직적인 위계구조에서 벗어난 수평적인 관계 획득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들이 맺는 관계망이 항상 친밀하고, 온전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이 보다 대안적인 관계로 기대하는 '여자친구'란 존재도 실상 개개인의 관계 맺기 방식에 따라 절실한 관계가 될 수 있지만, 최악의 관계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다 '관계지향적인' 여성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인간 관계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통찰이다. 오수연의 <부엌>은 관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성장하는 여성소설이자,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서로 주고 받게 되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애증과 욕망이 이글대는 낯선 부엌 ‘부엌’이라는 공간은 전통적으로 여자들의 영역으로 분류됐다. 장을 보고, 그 재료들로 요리하고, 요리한 음식을 적당하게 담아서 가족들에게 먹이는 것은 여자들이 맡아온 일이다. 그런데 광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부엌 가구들과 식기들을 걷어내고 음식 만드는 일을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게 된다. 장을 보고, 요리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또 다시 재료를 사는 이 일은 여성들에게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요구하는 고된 노동이다. 오수연의 <부엌>은 자애로운 주부들이 있어야 할 신비화된 부엌 대신 음식에 대한 애증과 타인에 대한 욕망이 이글대는 낯선 부엌이 등장한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들을 건조한 카메라 렌즈로 꼼꼼하게 살펴보면 낯설음과 혐오감이 느껴지는 법. 오수연은 부엌에 건조한 카메라를 들이대고, 요리하고 음식을 먹는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낯선 부엌의 주인인 '나'는 요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남이 만든 음식을 얻어먹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남에게 요리를 먹이는 일과, 남이 해준 요리를 먹는 이 두 과정은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요리를 해주어도, 즉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해도 상대는 나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으며 내가 상대의 요리를 먹어 그 호의를 받아들여도 결과적으로 내가 불행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잘해주고 싶은데도 살다 보면 날마다 이런 가해와 피해의 목록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다”는 ‘나’의 독백. ‘나’의 말대로 요리를 해서 음식을 먹는 것은 힘들고도 비루한 일이기에 피하고 싶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요리는 꼭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관계를 맺는 일 역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살다 보면 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위장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모와 무라뜨라는 두 남자와 알게 된다. 낯선 부엌이 등장하는 소설 속의 시공간은, 풍경에 대한 묘사로 보아 인도로 짐작되나 작가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 나와 다모, 무라뜨가 부엌에서 벌이는 기묘한 일상을 꼼꼼하게 묘사함으로써 <부엌>은 환상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다모는 채식주의자다. 여기서 채식주의자는 세상에 대한 기대와 욕심을 거세했음을 상징한다. 다모는 아무에게도 상처주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혼자가 되기를 택했다. 그에게 음식을 먹는 일은 살아있는 생물들에게 상처 주는 행위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둔 채 자기 자신만 살겠다는 행위이므로 매우 혐오스럽다. '나'는 삶에 찌든 다모의 피곤함과 절제, 그리고 채식주의를 배워 최소한의 재료와 최소한의 양념으로 간소하게 식탁을 차린다. '나'는 간소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다모를 바라보며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다모의 까다로운 채식을 만족시키는 일이, '나'의 욕망을 채우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나'는 다모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인 음식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지만, 점점 위장이 악화되는 다모는 내가 만든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만드는 일상이 음식을 만들고 먹는 상황을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상처를 주고 받는 과정을 제로로 만들고 싶다는 '나'의 독백은 '나'가 상처에 어느 정도 무덤덤해지는 어른이 아님을 의미한다. 어린 '나'에게는 '나'의 부엌에서 요리하는 또 다른 남자 무라뜨가 있다. 육식주의자 무라뜨는 다모 때문에 음식을 잘 먹지 못하게 된 '나'를 위해 향긋하고 강렬한 고기요리를 만든다. 다모와 '나'의 먹고 먹히는 관계(혹은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는 나와 무라뜨에게서 반복된다. '나'는 마치 다모가 '나'를 대하듯, 무라뜨가 만든 음식을 먹지만 결코 그에게 호의를 표시하지 못한다. 왜냐면 '나'가 욕망하는 사람이 다모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도 '나'의 부엌을 찾아와서 음식을 먹고, 음식을 만들던 두 남자는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 결코 모른 체 하고, 그 사이에 낀 '나'는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 상처를 주고 받는 ‘나’ 음식 먹기로 따지자면, '나'는 다모에게 먹히기를 원하고 무라뜨를 먹기를 원한다. '나'에게는 피식자 되기와 포식자 되기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내 욕망을 잘라내고 남에게 맞춰가며 쾌락을 느끼고픈 욕망(매저키즘적 욕망), 이와는 반대로 타인이자신의 모든 소원을 충족시키도록 강제하며 쾌락을 느끼고픈 욕망(새디스트적 욕망). 이 두 가지 욕망은 동전의 앞뒤처럼 존재한다. <부엌>에서 소개된 신 '끼르띠무카'(영광의 얼굴)은 이 두 이질적인 욕망 때문에 일그러지는 인간군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끼르띠무카'는 남이 자신을 먹어 치울까봐, 먼저 남을 먹어 치우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팔다리와 몸통마저 먹어버린 신이다. 그래서 악마마저 그를 피한다. 상대를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한 신의 이름이 왜 '영광의 얼굴'일까. '나'는 '끼르띠무카'에게 먹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차분하고 평안한 것을 발견한다. 음식이 되어 먹히는 위치가 편안한 이유는 제 손으로 종말을 맞이하지 앉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로서 서로를 견제하는 다모와 무라뜨 사이에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다모를 위해서는 무라뜨를 부엌에서 쫓아내고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며, 무라뜨를 위해서는 다모와 연을 끊고 음식을 먹는 일에 다시 흥미를 가져야 한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모와 무라뜨에 대한 '나'의 고민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나'란 존재가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즉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르기 그렇게 작고 세세한 문제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모 때문에 절제를, 이어 무라뜨 때문에 포식을 반복하던 나는 위경련에 걸리고 만다. 위경련 때문에, 다모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나'는 꿈 속에서 다모와 무라뜨를 먹어 치우고, 현실에서 무라뜨에게 자신을 먹어달라고 외친다. 옷을 벗고 식탁에 누운 채 무라뜨를 기다리는 '나'. 아무리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다모를 밀어내고 무라뜨가 의미하는 세계로 나가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음식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 던진 편안한 종말을 맞이하겠다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나'가 포식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 무라뜨에게, '나'를 먹어달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포식자와 피식자, 즉 상처를 주고 받는 '나'를 인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구성해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처럼 오수연의 <부엌>이 보여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성장하는 여성에 대한 통찰은 그 어느 작가에게서도 보기 힘들었던 성과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비현실적으로 제시된 시공간만큼,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나'의 성장이 무엇을 위함인지, 그리고 그 종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구현되지 못했다. 이는 <부엌>이 '관계지향적인' 여성들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들에 부딪치고 좌절하기 쉬운가에 대한 전체적인 밑그림이 아직 모자란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하지만 남은 아쉬움은,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넘겨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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