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9)

공숙영 | 기사입력 2010/04/07 [22:23]

전쟁과 평화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9)

공숙영 | 입력 : 2010/04/07 [22:23]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를 공격했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선 해가 바뀌고 짧은 겨울방학이 끝난 후 학생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학교 전체가 술렁이는 가운데, 연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토론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하다
 
▲ 이스라엘 가자 침공에 항의하며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열린 집회 (2009년 1월 산호세, 코스타리카 )   © 공숙영
그날의 토론회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모임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버스정류장에서 과 친구와 우연히 마주친 결과였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지 못 했다면 저는 그냥 귀가했을 것입니다. 종족분쟁으로 인해 엄청난 대량학살이 발생한 수단의 다푸르 지역 출신인 그 친구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 집회에도 함께 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토론회장으로 떠난 가운데 뒤늦게 혼자 토론회장으로 가려는 그 다푸르 친구와 함께 버스와 택시를 타고 움직였습니다.
 
토론회는 제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학교에서 열렸는데, 그 학교는 세계 각국에서 온 16~19세 나이의 십대 학생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였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명예총장으로 있는 그 단체는 여러 나라에 학교들을 두고 있는데, 코스타리카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토론회는 중반을 넘어섰고, 먼저 도착한 우리 학교 친구들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짓과 눈짓으로 인사한 후 자리를 잡았습니다. 발언을 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소리
 
▲ 안네 프랑크   © 출처: www.annefrank.com
많은 발언자들 중에서 이들이 입을 열자 토론회장이 들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의 토론회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이후 그때까지 제가 참석했던 다른 토론회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이 학교에는 이스라엘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학생 한 사람과 여학생 한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 다 긴장과 흥분 속에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청중 앞에 서서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남학생은 격앙된 모습으로 팔레스타인의 무장저항세력 하마스의 테러행위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자초했다면서 이번 사태는 이스라엘의 생존과 안전에 직결된 것이니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때리기를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함부로 홀로코스트와 비교하지 말라!” 여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일은 유감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난을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거나 쉽게 비교하지는 말기 바란다. 그런 식의 비유나 비교에 우리는 매우 상처받는다. 우리는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신들은 우리 유대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학생의 발언이 청중을 달아오르게 했다면, 여학생의 발언은 청중을 얼어붙게 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 말은 거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하여 가지는 근본적인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두 이스라엘 학생들의 발언에 촉발되고 자극받아 사람들이 뒤이어 계속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어떤 이는 열띠게, 어떤 이는 차분하게,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고, 제발 분쟁의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치자고 호소했습니다.
 
“당신들 말 잘 들었다. 그러나 당신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인류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발언했으면 좋겠다.” 이런 발언이 나오자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고, 저는 그 이스라엘 학생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붉게 상기된 모습이었습니다.
 
“함부로 홀로코스트와 비교하지 말라!”
 
▲ 홀로코스트 생존자 Sophia Kalski의 그림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  www.ushmm.org
우리학교 일행 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친구도 마이크를 잡으려고 나갔습니다. 발언을 기다리는 행렬의 거의 마지막에 서 있던 그 친구는 결국 시간이 부족하여 말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 녹차와 루이보스차를 나눠 마시고 함께 쭈그리고 앉아 잎꾼개미의 행렬을 본 친구였습니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말하려고 했었어. 아파르트헤이트가 남긴 것들 말이야. 우리가 어떻게 인종 간의 반목과 화해를 경험했는지에 대해.” 저도 궁금했습니다.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다시 그 이스라엘 여학생이 보였습니다.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규탄하는 발언을 했던 학생과 손을 잡고 선 채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는데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함부로 들먹일 수가 있지?”라는 말이 또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겪은 비극과 그로 인해 오늘날까지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거대한 유아독존적 피해의식과 보상심리, 그 결과로 성립한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국가 이스라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게 작동한 서구 열강들의 기획과 합의,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희생양들.
 
그 토론회 이후에 틈틈이 도서관에서 홀로코스트와 세계 각국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끔찍한 차별과 박해의 증거들 앞에 좀 어지러웠습니다. 동시에 현재진행형으로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참상이 현기증을 한층 배가시켰습니다.
 
새로운 희생양 만들기와 타인의 고통
 
코스타리카를 떠나오기 얼마 전 그 이스라엘 여학생을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국제학교 학생들이 자국자문화권의 춤을 발표하는 공연을 열었던 것입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공연이라 어쩔 수 없이 엉성함도 보였지만, 그 엉성함을 덮고도 남는 진지한 열정과 신선한 생기가 보는 이를 흥겹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각자 민족적인 것을 선보이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소박하나 성실하게 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그 광경 자체가 바로 세계적인 것, 그 순간만큼은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이라 불러도 좋을 어떤 원대하고 숭고한 목표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인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 Gustave Moreau <Salomé> 1876 ©출처: 위키피디아
차례로 국가별로 나와 각국의 전통 춤을 선보이는 그 속에 바로 그 이스라엘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지난 토론회에서 눈물 흘리던 모습과 달리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나와 독무를 하였습니다.

 
안네 프랑크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유대인 소녀가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살로메처럼 유대음악에 맞춰 유대 춤을 열심히 추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그날 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으로 건넸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당신들 유대인들이 겪은 일은 유감이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당신들이 겪은 고통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당신들이 최대의 수난자라고, 그러니 당신들이 선민이라고 결론내리지 말기 바란다. 다른 민족들이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난을 경시하지 말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박해하지 말기 바란다.’
 
모든 순서가 다 끝나자 무대 위로 모든 출연자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우리 청중들은 그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유대인 소녀도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출연자들의 등 뒤에 있는 무대의 벽에는 각국의 국기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도 물론 보였습니다.
 
문득 전쟁과 국가폭력을 반대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소위 유대국가의 테두리도 거부한 채 싸우다가 사라져야했던 소수의 유대인 급진주의자들 및 평화주의자들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궁금해졌습니다.
 
한반도 - 전쟁과 평화 사이
 
이 모든 기억과 상념과 연상의 끝에는 결국 제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의 현실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식민지배와 전쟁과 국가폭력과 학살을 모두 경험한 이 나라 말입니다.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지 아직도 우리는 그 실상과 진상을 알지 못합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에 더하여, 한반도의 분단 및 휴전 상황을 빌미삼아 무력행사를 선동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일부 세력의 호전성에 강한 분노와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결코 평화롭지 않다는 점을,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으며 평화를 얻고 지키려면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과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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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0/04/09 [00:48] 수정 | 삭제
  • 단지 홀로코스트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의 역사가 길고 깊었으니까 그만큼 피해의식도 비례해서 강해진 것 같습니다. 남아공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우리나라는 어쩌죠? @.@
  • 독자 2010/04/08 [01:19]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에서 갈등해결의 방식을 배워야 할텐데요..

    타인의 죽음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비교말라"는 유대인들의 유아독존 자세에 한숨이 나오네요. 이스라엘의 역사교육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장악한 미국미디어가 그리 만든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