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시선 > 장애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의 타화상은 휠체어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14) 두 명의 자화상과 한 마리의 타화상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쫄쫄2
배너
날 수 없는 앵무새
 
▲ 애니메이션 <리오> 중    
지난 여름, 부모님 손 잡고 온 아이들 틈에 끼어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 "리오"를 봤다. 주인공 "블루"는 야생에선 멸종된 스픽스 마카우(앵무새)의 마지막 혈통이다. 신비한 푸른 깃털에 다정하고 온순한 성격, 게다가 희귀성까지! (불행히도) 애완조로서 더할 나위 없었던 스픽스 마카우에 유럽 사람들은 열광했다.

유일하게 브라질에서만 서식하던 이 새를, 밀렵꾼들은 무자비하게 포획해 유럽에 팔아 넘겼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스픽스 마카우는 하루아침에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구원해주는 ‘로또’였다. 결국, 브라질 정부의 뒤늦은 후회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스픽스 마카우는 야생에서 멸종한 상태다. 블루는 앵무새 버전 "아나스타샤(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딸)"인 셈이다.


그런 블루는 애완조로서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생활했기에 나는 법을 모른다. 날 필요가 없다. 애써 날지 않아도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멀리 가지 않아도 안락한 집(비록 주인 집이지만)이 있으니까. 가정에서 길러지는 대부분의 앵무새들이 그렇다. 그래서 날지 않고 주인 곁에서만 움직인다.

다만, 나머지 새들은 날개 깃털을 잘린다는 게 블루와 다르다.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나라에서 온 앵무가 집 밖으로 날아가 폐사할까 봐 주인은 새의 깃털을 자른다. 멀리 날지 못하도록. 집을 찾아 돌아오는 비둘기와 달리, 한 번 바람을 타면 멀리멀리 날아가 돌아올 줄 모르는 예쁜 앵무새들. 그 새를 곁에 두는 방법은 윙 트리밍(wing trimming: 깃털 자르기)이 거의 유일하다.


내가 기르는 새들도 날개 깃털을 잘렸다. 빠르게 집 안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는 앵무새를 휠체어 사용자인 나는 따라잡을 수도, 컨트롤 할 수도 없었다(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긴데, 그렇게까지 해서 새를 키우고 싶은가 하는 질문은 이 글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처럼, 새에겐 어떠한 신체적 고통도 없지만 깃털을 잘린 새는 우울해하고 소심해진다. 그리고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앵무새는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을 땐 내게 사인을 보낸다. 주인이 그 사인을 못 알아 먹은 것 같으면 소리를 질러 주목을 끈 다음, 가고 싶은 곳을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면 내가 뒤늦게 알아채고 옮겨준다. 마치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의 관계 같지 않은가? 휠체어가 다니기 불편한 집 구조 때문에 많은 것을 부모님께 의존해야 하는 내 처지와 비슷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비행의 자유를 잃은 새는 주인의 사랑으로 보상 받고 싶어한다. 윙 트리밍(날개 깃털은 다시 자라기 때문에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해줘야 한다) 이후엔 좋아하는 장난감도 뒷전이고 내게 안겨 여기저기 긁어달라고 응석만 부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새를 더 예뻐해 주는 것밖에 없다.
 
그림 하나. 애완조 보니토와 프리다 칼로
 
▲ <보니토와 함께 있는 자화상>, 프리다 칼로, 1941     
프리다 칼로 어깨 위의 보니타도 애완조다. 화가의 뒤쪽으로는 생성과 소멸의 작은 우주가 펼쳐져 있다. 아가인 애벌레가 자라서 번데기가 되고, 완전히 성숙하여 나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태되고 죽어 버린 애벌레도 보인다. 애벌레에겐 나름 스펙터클 한 이런 스토리를 무심하게 뒤로 한 채, 화가도 앵무새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편안하게 캔버스 밖을 응시한다. 친밀하게 연결된 새와 사람은 한 군데를 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자, 프리다 칼로에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다.

큰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프리다는 왜 그렇게나 많이 그렸을까(그녀라면 자기애 때문에 그랬다 해도 놀랄 게 없을 듯 하지만). 장애를 가지게 된, 아름답고 당찬 여성 화가. 사람들은 칼로의 그림을 읽을 때 반드시 그녀의 삶도 함께 이야기 한다. 칼로의 작품이 불완전해서 그녀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이 꼭 필요한 걸까? 아니면 굴곡 많은 칼로의 생애를 아는 체 하고 싶어하는 호사가들의 값싼 낭만일까?
 
그림 둘. 유대인 누스바움
 
갑자기 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로 방향을 틀겠다. 최근에 나를 사로잡은 또 다른 자화상이 있는데, 누스바움의 것이다.

▲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 펠릭스 누스바움, 1943.    
“한 명의 남자가 밤거리에 서 있다. 관헌이 불러 세워서 뒤돌아보는 순간일까. 외투의 가슴 언저리에는 노란색 '다윗의 별'이 박음질되어 있다. 왼손에는 신분증을 들고 있다. 벨기에 왕국이 발행한 외국인등록증명서이다. 빨갛게 날인이 된 'Juif-Jood'라는 문자는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국적 난에 원래 적혀 있던 '독일'이라는 문자는 나치의 법령에 의해 유대 계 시민의 독일 국적이 박탈됨으로써 흰색으로 덧칠이 되어 지워졌다. 하늘에는 어두운 구름이 꽉 차 있고 불길한 새가 날아다닌다. 남자는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서 떠돌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드디어 벽으로 둘러싸인 구석으로 몰렸다. 더 이상 탈출구는 없다. (중략)

누스바움은 이렇게 해서 '유대인'이라는 범주에 그를 밀어 넣으려는 폭력을 자신의 자화상에 그려 넣었다. 그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외부로부터의 폭력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외치는 대신 굳이 '유대인증명서'를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후의 존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고뇌의 원근법(서경식 지음, 돌베개)>에서 발췌-
 
이 그림으로 오면서 갑자기 너무 비장해진 감은 있지만,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면 반드시 듣는 말 중에 "장애인 등록증 확인하니까 꼭 소지해주시구요"가 있다. 휠체어를 타는 것만으로는 자격 증명이 부족한 모양이다. 20대 중반엔 전화 상담원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 표시 들고 다니라는 건가요? 이 나라 사람이면 다 주민등록증 꼭 소지하고 다니나 보죠? 개 목걸이처럼 장애인 등록증을 목에 걸고라도 다닐까요?"
 
어디 콜택시뿐일까. 재택근무자 지원 이력서에도 장애인이라고 쓰지 않으면 면접 보러 갈 때 꼭 이런 말을 듣는다. "장애인이라고 왜 미리 얘기 안 했어요?"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에게도 먼저 밝히는 게 좋다. 내가 장애여성인 줄 모르고 이성으로서 관심을 갖는 남자가 생기거나,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 "장애인이셨어요?"라는 반응과 함께 분위기가 급 경색되는 무안한 상황을 피하려면.
 
무형의, 익명의 공간에서조차 난 나의 장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나치 시대의 유대인처럼 목숨을 뺏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소수자 그룹은 크고 작은 사회적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 어쨌든 이상하다. 성적 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도 사회가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한다. 그러면서 장애인에겐 장애인임을 밝히도록 이렇게 종용한다. 대체 나의 장애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길래 이렇게 장애인 증명을 강요하는 건가. 그래 옜다, 나 장애인이다!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나의 ‘전부’인가
 
칼로가 앵무새와 함께 있는 자화상은 그녀의 애조 보니타가 죽은 후에 그린 것이다. 같은 해 칼로는 아버지도 잃었다. 그녀가 입은 검은 상복과, 배경의 애벌레와 나비 이야기도 그들을 추모하는 뜻일 게다(보니타의 종류가 '아마존'이라는 사실이 배경에 의미 있는 터치를 더한다). 하지만 블루가 그랬던 것처럼, 칼로와 함께 있기 위해 야생성과 자유를 버리고, 그녀와 그녀의 방문객에게 기꺼이 재주를 부리고 애교를 떨어 준 보니타는 화가에겐 끝까지 자신의 "애완조"일 뿐이었나 보다. 자신의 어깨 위에서 내려놓지 않은 것을 보면.
 
반면,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고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가운데도 그녀의 모델은 자기 자신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 거울을 보며 상처를 돌보는 이 사진처럼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고, 스스로가 가장 좋은 모델이기도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임신을 할 수도 없었지만 사회는 이 부유한 유명인사에겐 어떤 식으로든 증명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다.
 
어떤 여성에게도 성별이 자신의 전부를 대표하지 않듯, 나에게도 칼로에게도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의 수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때로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는 그림도 그렸지만, 적어도 이 그림만큼은 장애여성으로서 그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대대손손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들의 숙명이다. 삶의 어두운 부분까지 받아들인 자연인으로서, 때론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으로서, 때론 아름답고 매혹적인 유혹자로서, 그녀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긍정했다.
 
나에게도, 잠시만이라도 장애여성이 아닐 권리를 달라. 이력서를 낼 땐 자격을 갖춘 지원자일 뿐이고, 사랑을 할 땐 자연인 여성일 뿐이고, 온라인 동호회에서 활동할 땐 공연 애호가일 뿐일 자유를 달라. 이렇게 주장해봤자 난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장애여성"일 뿐이다. 묘비엔 아마 "장애노인 죽다"라고 새겨질 것이다. 나의 타화상은 휠체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배너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1/12/06 [11:33]  최종편집: ⓒ 일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