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 사랑, 내겐 너무 처절한 이야기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22) 영화 <하늘이 보내준 딸>

호야 | 기사입력 2012/05/31 [16:09]

감동적 사랑, 내겐 너무 처절한 이야기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22) 영화 <하늘이 보내준 딸>

호야 | 입력 : 2012/05/31 [16:09]
[기사에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몇 년 전 여름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서해로 여행을 갔다. 몇 일 기분 좋게 지내다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마지막으로 바다를 좀더 보다가 올라가기로 했다. 한참 멀어진 바다를 향해 남편과 딸아이는 낚시 의자를 들고 가고 나는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딸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내게 오더니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족 같아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하늘이 보내준 딸>이라는 영화를 보고나니 그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를 위해 ‘똑같다’고 외치다
 
▲ 인도 영화  <하늘이 보내준 딸> 포스터
영화 <아이 엠 샘>의 인도 판이라고 하는 이 영화를 짧게 설명하자면, 출산 시 아내 비나가 죽은 후 지적장애인 아빠 크리쉬나가 딸 닐라를 키우고 있었는데, 닐라가 5살일 때 죽은 아내의 아버지와 여동생은 크리쉬나 등을 속여 닐라를 데려간다. 크리쉬나가 딸을 찾으러 다니면서 알게 된 변호사들이 그를 위해 법정에서 싸우는 과정이 그려진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으로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특히 재판과정은 의외로 흥미로웠다. 일반적인 법정 영화와는 달리 많이 어설프긴 했지만, 그 세련미의 차이는 있더라도 기저에 깔린 논리들의 대비는 실상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크리쉬나를 돕겠다고 나선 경력이 짧은 젊은 변호사는 얼떨결에 크리쉬나가 정상이고 비장애인과 같음을 주장한다. 이로 인해 그의 IQ진단서를 조작하고, 그를 상대 측이나 법정에 숨기려 하는 행동이 웃음을 자아내며 전개된다. 정의의 편에 서있는 듯한 이 변호사의 그 열의는 가상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논리가 단순하다.
 
그리고 실상 이들은 주인공을 비장애인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마치 현실에서 장애인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만 노력하는 이들을 보는 듯하다. 또한 “나도 똑같다”고 외치며 사는 장애인의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왜 비장애인과 똑같다고 주장하나? 이런 외침은 결국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는 전제를 갖고, 현실과 다르기에 공허한 선언이 되기 쉽다.

 
누구에겐 허용되고, 누구에겐 불가능한 것인가?
 
어쩌면 이들의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닐라의 순수한 질문에서 나타난다. 닐라는 “이모는 아빠랑 같이 살면서 왜 나는 같이 살면 안돼요?”라고 이모에게 묻는다. 이 모든 복잡한 상황과 감정에 대한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일 수 있다. 누구에게는 자연스럽게 허용되고 누리는 것들이, 왜 어떤 누구에게는 불가능한 것인가 말이다.
 
어떤 소수자의 권리는 ‘양육’의 권리처럼 타인의 삶과 밀접할 때 아주 복잡해진다. 특히 아이의 권리가 우선되는 상황에서 기르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권리를 얻기 위해서 이들이 보다 엄격한 기준에 통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내용상 승패의 기준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시킨 것은, 즉 독자들이 마음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부녀의 함께하는 삶을 허용한 것은, 크리쉬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라고 보인다. 자신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너무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까지.
 
그런데 과연 그 사랑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사랑 외에도 여러 장치가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어 보인다. 우선 닐라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양육에 대한 평가는 그 아이가 잘 자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장애인부모처럼 의심받는 입장에서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면이 있으면 바로 부모로서 자격미달로 치부되기 쉽다. 다행히도(?) 닐라는 무척이나 예쁘고 똑똑하다.
 
▲   영화  <하늘이 보내준 딸> 의 한 장면
그리고 아빠와 딸이 함께 지냈던 과거의 회상은 대부분 유쾌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를 기르고 함께 어울리는 장면은 정말 행복한 느낌이다. 게다가 아빠의 순수한 면은 딸에게 마치 창의성 교육을 하듯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그저 순수한 사랑으로만 딸과 함께 살 자격이 주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여하튼 그는 결국 아이와의 서로의 사랑을 증명하며 상대 측의 완고했던 변호사도 감동시키며 승소했다. 크리쉬나와 아이는 둘만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에게 적합한 의사소통 방법을 마련하기는커녕 속사포처럼 쏘아대며 딸의 학교명도 모른다고 그를 무능력한 아빠로 몰아가는 어른들과 얼마나 대조적이던지.
 
결말이 놀라웠는데,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쉬나는 아이에게 짐이 될 거라는 상대 측 변호사의 말을 떠올리며 잠든 딸을 다시 이모에게 안긴다. 그 선택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딸을 위해 잘한 것이라고?
 
만약 그 결말이 바뀌었다면, 즉 아빠가 딸을 포기하지 않고 같이 마을에서 함께 사는 장면으로 끝났다 해도 사람들은 이 아버지의 사랑에 지금처럼 감탄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지적장애인 아빠가 아이를 잘 키우며 행복할 거라며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을까? 장애가 있는 엄마로서 왠지 이러저러한 신경이 쓰여서 마음 놓고 아버지의 사랑에 빠지기 쉽지 않았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한편 이 부녀관계의 한 축에 다른 부녀관계가 설정되어 있는데, 크리쉬나와 닐라의 관계를 통해 크리쉬나의 변호사와 그의 아버지가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몇 년 전 그 바닷가에서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족 같아요.”라는 영화 속 대사같이 비현실적이었던 말이 떠오른 직접적인 이유인 듯하다.
 
바닷가에서 처음 본 사람이 우리가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본 근거는, 장애가 있음에도 웃고 떠드는 우리의 모습 때문이었으리라, 그 뒤에 자신들의 가족이 얼마나 갈등이 심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쉴새 없이 이어갔기 때문이다. 자신들보다 힘든 상황일 거라고 예측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행복해 보이면, 그것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마음에 대해 반성하게 만드나 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 변호사와 아버지도 자신들의 관계를 반추해 볼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되는 집단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정 짓긴 어렵지만, 이 영화는 지적장애인의 아버지로서의 가능성은 확장시키지 못한 채, 관객들의 아버지의 사랑 또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데 머무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바람직한(?)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이 영화에서처럼 장애와 관련한 이야기가 재현되거나, 장애인에게 말해질 때는 그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 또한 자칫 당사자들에게 낙인과는 또 다른 어떤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이 영화 포스터에 ‘사랑의 감동’이라든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든지 하는 문구가 있다. 내가 보기엔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기보다 너무도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인데 말이다. 아, 그러면 관객 수가 확 줄 우려가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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