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대는 몸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조주영씨는 음주가무에 능한 사람이다. 주량은 소주 한 병 반, 술자리는 20대엔 일주일에 5번(?), 지금은 2주에 1번 정도 갖는다 했다. 회수가 줄어든 이유는 나이 때문이라기 보단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해서 함께 마셔줄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나.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주영씨, 알고 보면 끼가 많은 사람이다.
무방비로 뛰어든 세상 ![]() 물론 노래로 먹고 살 수는 없었다. 훈련원을 나온 뒤로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업을 가질 궁리를 했다. 공장에 들어가 가구 광내는 일을 해보기도 했는데 팔이 떨어져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도 일당은 다른 곳보다 나은 편이었다.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몇 개월을 보내다 주영씨는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선택을 하게 된다. 보육교사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딴 것. “애들 가르치고 싶단 생각은 안 했어요. 선배들 사는 것 보다가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는 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구나 싶어서 배운 거죠.” 아이들과 보낸 7년 애들 가르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지만 자격증을 갖게 된 1997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다. 애들도 잘 따르고 어머니들은 더 잘 따른다는 평을 받아 온 주영씨.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잠시를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만큼이나 에너지가 많고, 살가운 성격의 그녀는 필자가 보기에도 보육교사로 ‘딱’이다 싶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난 원래 애들 안 좋아해요. 귀찮아 하는 편이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근데 이상하죠? 우리 반 아이들은 정말 예뻐요.” 그녀의 핸드폰엔 아이들 사진이 수십 장 들어차 있었다. ![]() 보육교사의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들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어린이집 구성원들과의 관계도 ‘일’에 포함되어 있다. “보육교사는 전문직이면서 서비스직이에요. 엄청난 서비스직이죠. 아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엄마들에 대해서도 그래요.” 해가 바뀌면 부쩍 변하는 아이들의 수위에 맞추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도 많다. 아이들이 접하는 매체들도 꿰고 있어야 대화가 통한다. 또 어머니들은 은근히 애들 선생님이 ‘품위가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즐겨 입던 청바지 면티 차림도 바뀌어가고, 안 하던 화장도 하게 됐다. 스물여덟의 방황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일한 지 7년째. 이것이 주영씨의 ‘천직’일까. 그건 모르겠다. 사실 그녀는 매 순간 갈등했으니까. 보육교사 5년차 되던 해, 그녀는 이 일을 완전히 접겠다 선언하기도 했다. “직업에 회의를 느꼈어요. 29살이 되어가는데 70-80만원 받고 12시간 넘게 일하고. 그런데도 원장한테 ‘교사’ 대우를 받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죠. 당시엔 고용보험도 없었고… 왜 아직도 내 자리를 못 찾았나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았고.” 국공립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법적인 한도를 지키지만 사립은 그렇지 않은 게 보편적인 현실. 월급에서부터 시작해서 수당, 보육교사 한 사람 당 맡을 수 있는 유아 수까지… 4살짜리 아이면 한 교사가 8명 정도 맡도록 제한돼 있지만 주영씨는 15명 이상도 맡아봤다. 휴가비 5-10만원 가지고 원장과 싸우고 나면 신세한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새로운 일을 찾아보겠노라고, 주영씨는 텔레마케팅 회사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여건은 보육교사보다 나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웬걸. 텔레마케터로 일했던 4개월 간, 그녀는 너무나 우울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린이집은 교사의 재량권이란 게 있는데, 여기선 시키는 대로만 하려니 너무 답답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2001년 12월 28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송년회를 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춤을 추다 발을 삐끗했는데,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치과에 수백만원을 바쳐야 하는 큰 사고가 난 것이다. “그 일로 정신 차렸어요. 이전까지 난 내 환경에 대해 원망했었거든요. ‘왜 내 부모는 그렇게 돈이 없나’ 하고.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론 ‘이 나이 먹도록 난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너무 죄송스럽고, 돈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죠.” 새롭게 되찾은 길 ![]() 작년, 한 가지 또 달라진 게 있다면 주영씨가 학생이 되었다는 점이다. 방송통신대학 교육과에 입학한 것. “굳이 학교 다닐 맘 없었는데 요즘 엄마들이 거의 대졸이니까요. 엄마들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경력이 있어도 학력 차에 따라 월급도 차이 나고, 교사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기거든요. 일은 내가 훨씬 잘 해도 ‘저 선생님은 대학 나왔으니까’ 해버리면 할말 없는 거예요. 아직은 학력이 많이 작용하는 사회니까.” 공부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재밌다”고 답한다. “고등학교 때 공부 진짜 싫어했는데 요즘은 책 보는 게 재밌어요. 공부 할 시기는 따로 있다더니, 몰랐던 것을 배우는 게 즐겁더군요. 뭐 못다한 한을 푼다는 정도는 아니고요.” 적응 혹은 성장 ![]() 7년 전부터 꾸준히 부어 온 적금통장이 있지만 사실 지금의 그녀는 “경제적으로 극히 불행하다.”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결혼’이 도피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도피처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고. 이젠 배우자감을 만난다 해도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준비가 된 상태가 될 때까지는 결혼할 맘이 없다. 대신, 30대 중후반이 되면 ‘원’을 하나 차리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됐다. 주영씨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미술학원에 출근하게 된다. 동갑내기 선생님이 ‘원’을 차리는데 주영씨가 일하는 스타일이 맘에 든다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온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교육을 하고 싶다는 점에서 의기투합했고요. 건물 계약하는 것부터 준비과정을 다 함께 하는 것이니,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아요.” 운전면허도 못 따고, 여행도 제대로 못 해보고 보내버린 20대가 영 아쉽고,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고 생각하며 사는 삶이라 별 볼일 없다”고 말하는 주영씨.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만나면 즐거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으니… 인터뷰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며 “별 볼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하겠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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