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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언어로 기록한 성희롱, ‘평등’을 읽다
<조이여울의 記錄>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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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는 장면들이 있다. 내게 강렬하게 기억되는 순간은, 우리 사회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날,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 건물 앞에서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서울대교수 성희롱사건'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다. 1심 재판부는 3천만원의 배상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당시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박희정
1993년 8월, 대학교수로부터 성적 괴롭힘을 당해오다 재임용에 탈락한 조교가 학내 대자보를 통해 자신이 겪은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그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사회에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개념을 구성하게 된 이 사건은, 학생회와 여성단체들이 연대하여 그 해 10월 가해 교수와 대학, 그리고 공립대학 관리책임이 있는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다.

 
소송은 1심에서 가해자 신 교수 측에 3천만 원 배상 결정이 난 후 곧바로 항소심으로 이어졌고, “인격과 존엄성을 훼손”한 위법행위로 5백만 원을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있기까지 5년간이나 공방이 지속하였다.
 
1994년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항소심의 현장검증이 진행되었던 서울대학교 화학과 실험실 앞으로 찾아갔다. 서울대 총학생회 학생들은 교수의 권력남용에 대해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고,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는 장소 주위에서 여성운동가들이 피켓을 들고 나와 시위를 했다.
 
당시에는 ‘직장 내 성희롱’을 다루는 법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수가 조교에게 한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며 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교가 교수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도 아니고, 몸이 다친 것도 아닌데, 무슨 큰 피해를 당하였다고 소송을 벌이느냐는 식으로, 해프닝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여성운동가들은 이 사건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위계를 이용한 성적 폭력이자 여성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중요한 범죄임을 알려내며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현장검증 장소에 나와 있던 학교 측 관계자들은 여성운동가들을 향해 “아줌마들, 집에 가서 밥이나 하지?” 라고 조롱했다. 바로 그 “아줌마들”이 역사를 바꾸었다. 1998년 대법원 판결이 난 후 한국사회에는 ‘직장 내 성희롱’이 성차별과 고용 평등을 다루는 법률로 규제되고,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너무나 힘들고 긴 여정을 겪어낸 피해자,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 변론을 맡았던 박원순 변호사, 그리고 수년간 소송을 지원하며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담론을 확산시키고 사회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모았던 여성운동가들이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었다.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더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 <일다> 박희정 편집장이 만화언어로 기록하여 펴낸 “모두가 함께 읽는 성희롱 이야기”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길찾기)     © 길찾기
최근 <일다> 박희정 편집장이 만화언어로 기록하여 펴낸 “모두가 함께 읽는 성희롱 이야기”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길찾기)를 읽으며, 그 역사적 순간에 교차했던 생각들이 다시 몰려왔다.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느꼈던 암담함, 한 여성의 고통과 용기에 대해 보냈던 공감과 지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여성운동가들의 열정과 의지에 힘을 얻고 감사했던 마음.

 
만화는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을 사례로 보여주면서 시작되고 있다. 작가는 만화를 기록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성희롱이 법제화된 지 15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성희롱에 대한 인식은 척박하고 여전히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람이 성희롱이 위법한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성희롱은 아직도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피해자들은 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가? 우리 국민은 왜 매년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성희롱을 접해야 하는가? 심지어 법원에서조차 성희롱 관련 법률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불공정 판례가 나오곤 하는 것일까?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는 이러한 절박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고 있는 책이다. 성희롱이란 무엇인지, 법적 개념과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지, 왜 계속 발생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성희롱으로부터 자유로운 일터를 만들 수 있는지, 만화언어를 통해 차곡차곡 이야기해나가고 있다.
 
지난달 16일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박희정 씨는 “공감”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성희롱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공감하지 못했기에. 작가가 보았을 때 그것이야말로, 법률로 금지하고 있는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이 척박한 이유이자 성희롱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유이다.
 
언론활동을 하며 직장 내 성희롱 사건들이 숱하게 발생하는 경위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작가는 “성희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만화를 쓰고 그렸다. 박희정 씨는 만화언어가 갖는 장점에 대해 “사람의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꼽는다. 주제가 무거운 만큼 부담감이 생기는 사안을 구체적인 사건 재현과 회화적인 만화언어로 전달하여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행위가 아닌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성희롱에 관해 많은 이들이 가진 오해와 편견들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공직자 성희롱이 발생하는 배경, 그리고 피해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폭력,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법조문을 일반사람들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도 새롭게 배워야 할 지식일 것이라고 본다.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넓힌다는 것의 의미
 
▲지난달 16일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언론활동을 하며 직장 내 성희롱 사건들이 만연하는 경위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작가는 “성희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만화를 쓰고 그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일다
‘평등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희롱은 정말 단순하고 명확한 사안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왜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에게, 후배에게, 고용인에게 성희롱을 하지? 성희롱을 겪은 노동자가 구제 요청을 하는데, 사용자는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징계하지? 동료는 왜 가해자를 두둔하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말꼬리 잇기를 하는 거지? 상식적이지 않지 않은가.

 
문제는 그 상식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아니, ‘평등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상식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탓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해온 인습 속에 ‘남녀의 불평등’이 전제로 깔려있고, 사회구성원들은 여성의 몸과 인격을 남성과는 다르게 차등 취급해온 사회적 관행에 물들어있다. 그러므로 성희롱 관련 법이 존재해도, 성희롱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자동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2004년에 한 초등학교 교감이 회식자리에서 여교사에게 ‘교장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행위에 대해, 법원이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결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교직 7년 차 교사가 술자리 문화에 대한 칼럼을 <일다>에 기고했는데, 교원사회에 대해 너무 소박한 바람들을 적은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교장, 교감 옆자리에 젊은 여교사를 배치하는 충성을 보이지 말아달라’, ‘술 따라라, 마셔라, 2차를 가라, 강압적으로 굴지 말아달라’, ‘성희롱 관련한 교육의 자리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성희롱이 이슈가 되었을 때 당한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달라’, ‘자신이 즐기기 위한 술자리도 좋지만 남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서로 존중해달라’는 내용이 그 교사가 바라는 것이었다.
 
여자직원은 ‘사무실의 꽃’이 아니라 남자직원과 마찬가지로 직원일 뿐이라는 것을, 여성들이 사회적 공간에 진출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없이 호소해왔다.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생기고 이만큼 공론화된 것도,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에 빚진 결과이다. 이들의 용기가 성차별의 관습과 통념들을 밀어내는 동력이었고, 지금도 우리는 그 과정에 있다.
 
가부장제 문화에 길든 사회에서 ‘성희롱을 해선 안 된다’는 상식이 진짜 상식으로 자리 잡으려면, 인습을 깨기 위해 별도의 관심을 기울여 배우고 함께 노력해가야만 한다.
 
나의 동료이기도 한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의 작가 박희정 씨는 사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이다. 성희롱이나 차별,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해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일일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사과할 기회’, ‘성찰할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속한 공간에서 성희롱에 관해 이야기해볼 수 있는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나도 더욱 평등한 사회를 바라며 이렇게 희망한다. 아직도 많은 일터가 성희롱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배울 기회를 갖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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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05 [08:53]  최종편집: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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