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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앞장선 1919년 기생들
[특집]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유산②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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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에서는 3.1절을 맞이해 총 4회에 걸쳐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비폭력 원칙을 끝까지 지키다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기생들이 청년들 가슴에 독립사상을 불 지른다”


1919년 십대 여학생들과 더불어 전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활약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생들이다.
 
조선 사회에서 기생 신분의 여성들은 집안이라는 여성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 남성들, 특히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사회적 영역에 존재하는 계층이었다. 후대의 역사기록과 문학 등에서 이들의 존재를 남성지식인의 구미에 맞게 각색하거나 폄하하여, 기생들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와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당시 경성에 부임한 일본 경찰의 눈에 비친 기생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기생들의 모습들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최초의 여성 일간지 기자로 알려져 있는 추계 최은희가 집필한 『한국 근대 여성사 (상)』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희씨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기생들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경성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놀아나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8백 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라는 것이 옳을 듯했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 경성 장안 백여 처 요정은 불온한 소굴로 화해버렸다. 간혹 우리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 오는 일이 있어도 그 태도는 냉랭하기가 얼음장 같고 이야기도 않거니와 웃지도 않는다. 그 분위기야말로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다.”
 
이것은 1919년 9월, 치안책임자로 경성에 부임한 일본 경찰 지바료가 총독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해 3.1운동 당시 많은 기생들이 남자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선동하는 독립투사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해주, 기생들이 이끈 시위대가 3천명에 이르러
 
뿐만 아니라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통해 진주, 통영, 수원 등 각지에서 조직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해주에서는 기생들이 지휘하여 고을 전체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생들을 ‘사상(思想)기생’이라 하였다. 이들은 다양한 예술적 기능과 학식을 갖춘 계층으로, 정통적인 예기에 해당하는 여성들이었다.
 
“수원에서는 3월 25일부터 연일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29일 수원 기생조합 일동이 자혜병원 앞까지 행진하며 벌인 시위가 큰 기세를 모았다. 일본 헌병들이 병원으로 추격하자, 학생과 상인, 노동자 등 군중이 기생들을 옹위하며 병원을 에워싸고 만세를 불렀다.”
 
최은희는 당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에, 해주기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해주에서는 김월희, 문월선, 김용성(예명: 해중월), 문재민(예명: 형희), 옥운경(예명: 옥채주) 이렇게 다섯 명의 기생들로 맺어진 결사대는 목숨을 걸고서 ‘남자의 힘을 빌지 말고 서로 합심동체가 되어 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자’고 언약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오전 10시로 시일을 정했다. 독립선언서를 얻을 길이 없으므로 월희와 월선이 국문으로 글을 지어 시위 참여자에게 배포할 활판인쇄물을 제작하였다.
 
해주읍에서는 3월 10일 이후 만세시위가 그치지 않았으나, 4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한 고을 전체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논개와 계월향의 후예임을 내세운 기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를 벌이자, “기생들도 독립을 위하여 몸을 바쳐 투쟁하는데...” 하며 가정부인들도 집밖으로 떨쳐 나와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만세대열에 뛰어들어 기생을 앞세운 시위대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최은희는 해주감옥에 있을 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생들이 당하는 그 참혹한 고문광경을 목도하다시피 하였다고 밝히며, “그녀들은 온 몸에 멍이 들고 화상을 입어 시퍼런 맷자리는 구렁이를 칭칭 감아놓은 것처럼 부풀어 올라서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기생조합 통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위 전개
 
기생 시위에 관한 기록을 보면, 기생들은 한 조직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매일신보」를 비롯한 신문 기사에도 ‘진주 - 기생이 앞서서 한국국기를 휘두르며…’, ‘수원 - 수원조합기생일동이 자혜의원으로 모여들어…’, ‘안성 - 기생들 만세… 군중 천여 명과 면사무소에 들어가 만세를 부르고 이동해 산에 올라 일제히 한국의 국기를 휘두르며 산이 동하도록 소동…’ 등 기생이 주도한 조직적인 만세시위를 보도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서 ‘사상(思想)기생’들은 기생조합 등을 통해 당시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물여성사: 한국편』의 기록을 보면, 진주에서는 3월 18일 저녁에 기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모의를 했으며 19일의 시위에 박금향 등 32명이 참여해 행진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논개의 후예다. 진주 예기의 전통적 긍지를 잃지 말라”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불렀다.
 
기생들이 투쟁에 나선 것을 보고 “백정의 아낙”들도 육고에서 쓰는 칼을 들고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은 이들을 체포한 후 이마에 칼로 ‘에다(천민, 백정이라는 뜻)’라는 글자를 새기는 악랄한 짓을 자행했다.
 
통영에서의 만세시위도 격렬하게 일어나 3월 28일과 31일 그리고 4월에도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통영의 예기조합 기생 정홍도와 이국희가 금비녀와 금반지를 팔아 광복 4필을 구입해, 33명의 기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서 시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이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국권을 빼앗긴 사회구성원으로서 동등한 주체로 선 民들의 범국민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기생들의 독립운동역사를 놓쳐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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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3/06 [03:30]  최종편집: ⓒ 일다
 
현신 13/03/08 [11:06] 수정 삭제  
  성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서...당황스러운 채 아직 정리를 못 하고 있는데...뭔가 인식을 달리 해야할 것 같네요. 사상기생이라니...콱 꽂힙니다, 하긴 예기 황진이를 봐도 안방에서 매춘을 하는 게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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