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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의 땅, 브르타뉴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1)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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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필자의 말
 
“떠난 뒤에야 내가 잘 보였다는 걸,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걸, 다시 떠나와서야 생각한다.” 

▲ 브르타뉴 지도 * 출처: Chrystel Courtin 그림, pascal Coatarlem, Bretagne, cap sur le grand large (De la martiniere Jeunesse, 2001) 중에서     © Chrystel Courtin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 브르타뉴
 
나는 작년부터 하던 일을 멈추고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다. 이건 순전히 재충전과 변화를 모색하기 위함인데, 프랑스를 선택한 것은 옛날 유학생활을 했던 곳이라 익숙한 점이 많아서였다.
 
또 프랑스 중에서도 브르타뉴 (Bretagne)지방을 선택한 것은 이곳이 프랑스의 어느 곳보다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프랑스에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에 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특색 있는 점이 많다는 데 놀라고 있다.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브르타뉴지방은 대서양을 향해, 서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다가 삼면에 위치해 있어서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어업이 발달한 모습이 우리와 닮아 친숙한 모습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맨 서쪽은 ‘피니스테르’(Finistere), 중앙의 위쪽은 ‘코트다르모르’(Cotes-d’Armor), 아래쪽은 ‘모르비앙’(Morbihan), 그리고 맨 동쪽은 ‘일에빌렌느’(Ille-et-Vilaine),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옛날에는 루아르-아틀랑띠끄(Loire-Atlantique)지역까지 브르타뉴에 속해 있었으나, 1957년 루아르-아틀랑띠크가 브르타뉴지역에서 다른 행정지역으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네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눠진 브르타뉴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크게 동서로 구분 짓는데, 서쪽을 바스-브르타뉴(Basse-Bretagne), 동쪽을 오트-브르타뉴(Haute-Brertagn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서쪽 지역의 바스-브르타뉴를 ‘남부(Sud) 브르타뉴’, 오트-브르타뉴를 ‘북부(Nord) 브르타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동서로 위치한 지역을 남과 북으로 부르는 건 참 신기하다. 

▲ 브르타뉴의 옛모습(Bretagne des mille et une images 전시회 중에서)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형성된 독특한 문화
 
이곳 브르타뉴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바다를 건너 이주해온 여러 민족의 후손들이다.
 
먼저, BC 2세기에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켈트족이 브르타뉴로 이주해 온다. 만화책의 주인공들로도 유명한 오벨릭스와 아스테릭스가 바로 이들이다. 이 켈트족은 이후 ‘아르모리끄’(Armorique)지역에 산다고 해서 ‘아르모리깽’(Armoriquain)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르모리끄는 브르타뉴지방을 지시하는 골언어(gaulois)에서 기원한 말로, ‘바다 근처’(proche de la mer)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다가 BC 57년, 로마인이 아르모리끄를 정복하게 된다. 이들은 약 4세기 동안 아르모리깽들과 어울려 살면서 걀로-로만(gallo-romain)문화를 이룩했으며, 농업과 상업을 꽃피웠다.
 
그 후 AD 4-6세기 동안에는 현재 영국 땅으로부터 수천의 브르통(les Bretons)들이 바다를 건너, 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실제로 오늘날 이 지역을 가리키는 ‘브르타뉴’라는 이름은 ‘브르통들이 사는 땅’(le pays des Bretons)이라는 뜻이다. 브르통들은 이미 아르모리끄 지역 사람들과 교역을 해왔으며, 비슷한 언어를 사용해 온 터였다.
 
따라서 오늘날 브르타뉴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켈트족과 로마인, 영국에서 이주해온 브르통들의 후손들이다.
 
20세기초에는 브르타뉴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파리와 케나다, 미국과 같은 곳으로 이주해 간다. 한편,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옛날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오늘날 브르타뉴는 백인과 흑인, 기독교도들과 회교도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앞으로 더 역사가 지나서는 이들이 브르타뉴인들의 형성에 덧붙여질 것이다.
 
브르타뉴는 이렇듯 철저하게 이주민에 의해 이룩된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아온 만큼, 브르타뉴는 다양한 문화들이 오랫동안 잘 어울려 존속되어 왔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동안 생활해봤던 남부프랑스나 북부프랑스보다 이곳 브르타뉴 지방이 인종차별이 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른 지방에 비해 이방인에게 좀 더 관대하고 상냥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선조들이 당시 이방인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 브르타뉴의 옛날 아이들 모습(Bretagne des mille et une images 전시회 중에서)    

프랑스와의 대립, 저항의 역사
 
이렇게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이룩한 브르타뉴는 공작령으로 프랑스와 독립된 국가로 존재했고, 프랑스 왕조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당연히 국민들은 전쟁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다. 그러다가 브르타뉴의 통치자였던 프랑수와 2세의 죽음 이후, 브르타뉴의 새로운 공작이 된 12살의 ‘안느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가 프랑스의 왕, 샤를르 8세와 1491년에 결혼을 하면서 브르타뉴는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된다. 그래서 브르타뉴에서는 안느를 평화를 가져다 준 왕비로 오늘날까지 칭송하고 있다.
 
샤를르 8세가 죽자, 안느는 다시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결혼을 한다. 1514년 안느가 죽고, 루이 12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클로드(Claude)가 브르타뉴의 상속자가 된다. 그녀 역시 1515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와 결혼한다. 그러다가 1532년 클로드가 프랑스 왕조에 브르타뉴를 바침으로써, 브르타뉴는 프랑스 영토에 통합된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고 해서 프랑스 왕조에 브르타뉴가 복속된 것을 모두 좋아한 것은 아니다.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합병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저항이 존재했었다. 저항정신 속에 이어온 지역주의가 ‘브르통 민족주의’로 발전해, 거센 저항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PNB(브르타뉴 민족 정당)의 창설로부터다.
 
그것은 렌의 한 호텔 앞면에 덧붙여진 조각의 낙성식 직후였는데, 그 조각은 안느 드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왕의 발아래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을 만든 부쉐(Boucher)는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결합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지만, 브르타뉴 사람들은 “치욕스러운 기념물”로 여겼다. 몇몇 젊은이들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호각을 불며, 거리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이 분리를 주장하는 브르타뉴의 극단적인 활동을 형성하게 된다. 1932년 셀레스탱 래네(Celestin Laine)라는 대학생이 파리에서 만든 폭탄으로 이 기념물을 폭발시킨 사건 이후, 더 이상 이 조각은 남아있지 않다.
 
그 후, 1968년 생브리유(Saint-Brieuc)에서 첫 번째 폭탄테러가 있었고, 이때 구속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사면이 이루어졌다. 이후, 첫 소송이 이루어진 것은 1972년이다. 이렇게 테러와 소송이 1980년대 초반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까지 두 번, 그들 자신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이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0년, 디낭(Dinan)근처 맥도날드에서 터진 폭탄으로 로랑스 튀르백(Laurence Turbec)이라는 젊은 여성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 내부에서조차, 테러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대부분이 테러에 참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브르통어, 고유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
 
한편, 바스-브르타뉴 지역 사람들은 ‘브르통’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 왔다. 브르통어는 아르모리끄의 골(Gaul)사람들이 사용했던 켈트어의 한 종류다. 켈트어에는 브르통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어, 스코트랜드어, 걀로어 등이 속한다.
 
수세기 동안 브르타뉴 서쪽, 바스-브르타뉴 지역에서는 브르통어를 써왔다. 오트-브르타뉴는 전통적으로 걀로(gallo)어를 썼다. 걀로어는 불어와 많이 다르지 않아, 오트-브르타뉴의 더 동쪽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쪽의 바스-브르타뉴인들이 사용하는 브르통어는 불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복속된 이후부터는 프랑스어의 영향 아래, 특히 도시에서 브르통어는 점점 뒷걸음질 치게 된다. 그런 중에도 바스-브르타뉴의 주민 75%가 브르통 언어를 써왔는데, 19세기에 들어 브르통어를 사용하는 이 지역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불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다.
 
당시 아이들은 혹독한 벌을 받아가며 불어를 배웠다. 그러나 집에서 부모들과는 그들의 언어인 브르통어로 대화했다. 브르통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불어에게 자리를 내주어 나갔다. 다음 세대에 접어들었을 때는 불어가 제 1언어가 되었고, 브르통어는 부모들의 의지에 따라 존속되어 나갔다.
 
그 후, 브르통어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이때부터 브르타뉴의 도로의 간판과 공공장소에 불어와 브르통, 두 개의 언어를 모두 표시하게 했다.
 
또 1977년 피니스테르 지역의 브레스트(Brest) 근처, 랑뽈-쁘루달메조(Lampaul-Ploudalmezeau)에 모든 과목을 브르통어로 교육하는 디완(Diwan)이라는, 유치원이 한 학급 딸린 초등학교가 세워진다. 디완은 브르통어로 ‘새싹’(germe)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학교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더 큰 학생들까지 포함했다. 1988년에는 역시 브레스트 근처의 헐렉끄-께흐원(Releck-Kerhuon)에 중학교가 문을 연다. 이어, 6년 뒤에는 같은 장소에 고등학교가 세워진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브르통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해, 교육기관, 표지, 텔레비전, 일상생활 등에 더 자주 브르통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브르통어를 현대 생활 속에서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브르통어 시민 사무소’가 세워진 것은 2001년의 일이다.
 
1994년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브르통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28만 명에 불과하며, 이 중에서 71%가 60세 이상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적어도 1만 5천명이 사라져, 2010년에는 브르통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20만 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브르통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 불어와 브르통어를 함께 표시한 표지판 (Vannes에서)    

박제되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전통문화
 
언어뿐만 아니라, 브르타뉴는 전통적으로 의상이나 머리장식, 음악과 춤 등의 문화적인 면도 매우 특색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마을의 축제를 통해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해가는 형편이다.
 
지난여름, 알랑 스티벨(Alan Stivell)의 공연이 내가 살고 있는 렌(Rennes)에서 열렸다. 프랑스 전역에 유명한 알랑 스티벨은 켈트족과 브르통의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작곡가 겸 가수로, 그의 노래들은 민족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그의 콘서트를 보는 관람객들 역시 비장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콘서트 막바지에 영국과 아일랜드에 흩어져 있는 켈트족의 재결합을 기원하는 말을 스티벨이 했을 때, 관람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그의 마지막 노래를 모두 기립해서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게 기립해 자기 민족정신을 담은 음악에 감동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조차 나는 사라져가는 문화와 민족들을 본다. 그저 여름축제에서나 소개되는 전통음악과 춤, 아니면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을 뿐인 문화전통과 독특한 의상들… 사라지고 있는 문화…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브르타뉴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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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5/27 [16:43]  최종편집: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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