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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의 '외로움'
죽음연습(13) 죽음의 과정 직면하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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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새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갑작스런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
 
오래 전, 대학 후배와 어떤 죽음을 맞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후배는 사고를 당해 갑자기 죽기보다는 ‘병에 걸려 죽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병에 걸려서 죽으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인 심장전문의 버나드 라운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은 그 후배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고통을 받으며 천천히 죽기보다 불현듯 죽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일수록 갑작스러운 죽음을 더 갈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오늘날, 다들 죽음이 불시에 덮쳐 오길 바라는 것일까? 어쩌면 중년이 된 그 후배도 지금쯤은 20대 때의 생각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갑자기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이때 문제가 되는 고통은 비단 육체적 고통만은 아닐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정서적 고통, 심리적 고통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병원에 입원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을 살펴보면, 죽어가는 사람이 더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 자존심과 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에서 그 고통이 비롯된다.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며 자신의 삶을 순전히 타인들에게 내맡겨야 하니, 얼마나 모욕적이고 절망스러울까? 만약 숨 쉬고 먹는 것조차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면, 죽어가는 환자의 남은 삶은 아무리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삶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의학의 연구대상으로 전락해 더는 사람 취급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그 분노는 더할 것이다. 어떤 환자의 표현을 빌자면 ‘지옥에 떨어지는 느낌’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을 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화를 내고 괴로워할 의식이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해야 할까? 병원에서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겨울지 지금은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의학적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하지만 병원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기에 앞서, 더는 치료할 수 없는 죽을병에 걸렸다는 의학적 사형선고를 받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충격은 적지 않을 것이다.
     
프랑수와 사강의 단편소설 <길모퉁이의 카페>를 보면,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느끼는 심정을 ‘살갗이 일그러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살갗이 일그러지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작가가 죽어가는 자의 적지 않은 정서적 고통, 크나큰 불안과 공포심을 묘사하려 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내면 저 깊은 곳은 감당하기 어려운, 지독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소설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마르크란 인물은 병원을 나오자마자 길모퉁이 카페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마에 당첨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카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턱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다.
 
나는 이 역설적인 마지막 대목을 잊을 수가 없다. 경마당첨이라는 행운으로 가장해 사람들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 죽음을 가까이 둔 사람의 고독이 더 깊이, 더 처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고받은 당사자는 그 순간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삶 밖으로 튕겨 나와 홀로 죽음의 수렁 속으로 가라앉는 구나!’ 하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더 외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죽는 순간도 홀로 맞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가는 과정도 외로운 여정이긴 마찬가지다. 죽음으로의 이 고독한 여행의 첫 걸음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선고받는 바로 그 순간, 내면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가 탄생하는 순간 죽음을 향한 여행을 이미 시작한 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죽음을 직면하고 자각하는 사람만이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고독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의 죽음은 고스란히 나 자신의 몫이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죽음의 순간, 우리의 의식이 향하는 곳은…

 
그런데 죽음 직전까지 -의식이 있는 한- 우리는 홀로 죽어가는 사실 때문에 심각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는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네덜란드 의사 베르트 케이제르는 그의 저서 <죽음과 함께 춤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다는 것을 안 사람은 없다. 우리가 죽는 것도 그와 닮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의사는 죽음의 문턱을 넘기 위해 죽음과 격렬하게 투쟁하며 죽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고 말한다. “죽음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불편을 주는 이불 주름이나 복도에서 새나오는 성가신 불빛과 씨름하다가 죽는다. 사람은 깨닫지 못하면서 죽어갈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눈부신 태양의 빛을 끝까지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그 문턱을 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직시해낼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에 앞서 죽음의 문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죽음의 순간을 외면해서일까? 아니면 죽는 순간에 앞서 의식이 미리 닫히는 것일까?
 
죽어버린 사람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마당이니, 죽어가다가 마침내 죽음을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은 절대로 대칭이 아니다. 그래서 탄생과 비유해서 죽음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는 순간은 태어나는 순간과 같지 않고, 삶의 양끝에 죽음이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앞의 고독보다 두려운 것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건, 알아차리지 못하건, 죽어가는 동안 의식이 있는 한, 참으로 외로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울 수 있다는 까닭은 적어도 아직 죽지 않았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의식하는 삶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에 직면한 외로움은 삶이 마지막으로 안겨주는 강렬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비록 죽어가는 동안 겪게 될 고독이 두렵지만, 나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외로움을 피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맞는 고독을 갈망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난 그저, 삶을 불시에 훌쩍 떠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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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04 [11:44]  최종편집: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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