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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자라나는 목소리들
<나의 페미니즘> 기록하는 사람, 낭미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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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내가 만약 글을 쓴다면…

나는 경상북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외지 참새가 오면 전깃줄에 앉을 자리도 없다”고 은근히 텃세가 있는 동네였다. 어릴 때는 반공교육을 받았고 ‘일어서는 갈대’나 ‘푸른 하늘에 붉은 구름이’ 같은 반공소설들을 숙제로 읽고 독후감을 썼다. 학교에선 의식화 운운하는 선생은 빨갱이라고 했다. 성공하려면 이곳에서 벗어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밖에 없다는 말을 학교와 집에서 내내 들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산 중턱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걸어가고 밤 열한 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세상은 집과 학교 둘뿐이었다. 밤길을 걸으면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대놓고 손가락질하는 남자들도 간간이 맞닥뜨렸다.

공부가 안 될 땐 학교 앞 동산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갑갑했다. 수업시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함을 운운하는 어떤 선생들의 의식이 갑갑했고, “술집 가면 너희 또래 애들 천지빛깔이다” 하며 공부하라고 협박하는 어떤 말이 싫었고, 딸의 방의 문을 불쑥불쑥 열어 공부하는지 확인하는 부모님이 피곤했고,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에도 여자애들이 인신매매로 잡혀간다고 횡행하는 소문이 두려웠다.

새벽에 남몰래 한 시간씩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그때 시몬느 보봐르의 <제2의 성>을 읽었다. 새로운 세상을 본 듯 참 좋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아동성폭력의 피해자인 김부남이 이전의 가해자를 살해하고 “나는 짐승을 죽였다”고 한 말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보은, 김진관 사건”도 연일 보도되었다. 내가 앞으로 글을 쓴다면 이런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알렸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이런 건 성폭력이구나, 맞서 싸울 수 있는 거구나, 이 사람은 평생을 걸쳐 미워하고 그것과 싸웠구나,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때때로 엄습하는 무기력, 말할 수 없는 위치라서 맞닥뜨리는 무기력과 싸우고 싶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할 때 분노하고 싸우고 다친 여성들을 기억하고 같이 외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들이 들려준 이야기

서울에 와서 대학교를 마치고 성폭력상담소에서 근무했다. 상담원 교육을 들을 때는 여자들끼리 마음껏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시간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학교와 쉼터에 가서 성교육을 했다. 학생들과 성 이야기도 나누고 콘돔이며 루프며 페미돔 같은 것을 들고 가 피임도 가르쳐주었다.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피임을 설명할 때면 관심들이 높았다. 내가 받지 못한 성교육을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미혼모 쉼터에는 임신한 여자애들이 있었고, 개중엔 강간을 당한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교육이 끝난 다음 나한테 나직이 이야기해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떻게 납치되었으며 어떻게 폭행을 당했고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에겐 어떻게 숨겼는지…… 어떤 친구는 입양을 보내고 나서 고통스러워서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천정을 이리저리 올려다보며 나를 등지고 서서 울었다.

내가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들에게도 성교육을 한다니 어떤 성직자는 “그 여성들한테 무슨 성교육이냐?”며 웃었다. 화가 났다. 성이 팔렸다는 것과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때 내가 임신을 한 상태에서 성교육을 하니 그네들은 내 부른 배에 자꾸 눈길을 보냈다. “나도 선생님처럼 임신할 수 있을까요?” 부러움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임신과 낙태와 출산이 어떠했는지 솔직히 들려주었다. 그들은 여자의 의견이 존중되는 섹스가 있다는 것을 낯설어했다.

이런 얘기도 해주었다. ‘비즈로 목걸이를 만드는데 이걸로 자립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대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교복을 찢어 상보로 썼다, 그래서 난 지금도 책을 들고 가는 대학생을 보면 그 책을 확 빼앗아버리고 싶다.’ ‘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삼촌 집에서 자라느라 열 살 때부터 김치를 담그고 그때부터 강간을 당했다. 그래서 가출했다.’ ‘맨 처음 만난 남자친구는 난 절대 못 잊는다. 걔가 날 술집에 팔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 축구선수 알아? 나랑 잔 애다, 쟤 피부가 나보다 더 좋아서 내가 아침에 몸을 숨겼다.’ 이런 이야기들.

유식하지 않고 고통과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말할 줄 모르며, 아프다고 표현하지 않는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촌 여성활동가의 자서전 작업 일을 하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버스를 타고 송탄을 오가면서 선생님이 인생을 구술해주는 말을 듣고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기지촌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소리 없이 살해당했는지 전해 들었다. 나는 기록을 하면서도 한 사람의 인생이 몇 마디의 언어로 추려져 한 권의 책이 된다는 것이 슬펐다. 사연 가운데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와 그럴 수 없는 이야기를 가려내야 했다. 좀 지쳤다.

결혼, 가족… 믿기 어려울 만큼 보수적인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집에 틀어박혀 일상의 이야기를 썼다.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로 갑자기 변하기를 요구 받는다든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가, 남편과의 관계가 풀리지 않는다든가, 집과 일터에서 성별분업이 나누어져 있다는 걸 많이 고민했다. 새로 만난 이웃 여자들 이야기도 썼다. 아토피를 앓는 아이를 돌보며 나는 우울했고, 주변의 질책과 죄책감에 몇 년 동안 버거워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여물지 못하다.”고 했지만 억울했다. “공부시킬 필요 없어. 결혼해서 애나 잘 키우면 되지.” 하는 말에는 대들었다. 결혼을 하고 겪게 되는 일은 이전에 겪던 일과 달랐다. 가정이란 것은 믿기 어려울 만큼 세상과 고립되어 보수적이고 여성 차별적이었다. 가족이란 것이 많이 바뀌었다 해도 여전히 여자를 밥솥이나 빗자루 취급하는 걸 보면 민주화된 사회보다는 조선시대와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나는 시댁에 가면 ‘아기’라고 불렸고 ‘엄마로서 그게 뭐냐? 엄마가 그것도 못하냐?’는 비난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서 더했다. 그 비난은 모성의 완벽한 기준에 견주어 비난하는 것이기에 터무니없고 현실과 다른 것이었지만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쩔쩔매었다. 밤잠을 못 자고 아이를 간호하고 누구보다 애타고 걱정되는 건 나였는데도 그랬다. 은연중에 나도 완벽한 엄마,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계속 가족에게 미안해하고 자책했다.

나는 여성주의자였지만 그것이 또 비난의 빌미가 되었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인데 나한테 왜 의지해? 나가서 일하지 않고.’ 백일 된 아기를 안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좌불안석이었다.

내 안의 모순된 것들, 나의 의식과 괴리된 오래된 습관, 집안에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충돌을 일으켰다. 이때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의식은 후퇴하고 나는 사랑과 대화에 굶주린 여자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의존성과의 싸움, 독립적인 삶을 향하여

다행스럽게, 전부터 하던 글쓰기모임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고, 다른 여성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지지해주었다.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너는 의미 있는 존재다, 계속 글을 써보라,’ 나를 한 사람으로 보아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지인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틈틈이 썼고 그 후로도 기회가 닿으면 다른 여성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다. 화장품 장사를 하고 외판원을 하면서 평생 노력해 집 하나 장만했는데 강제로 빼앗긴 철거민의 이야기도 듣고,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살아온 여성농민이 들려주는 오래된 민요도 들었다. 세상에는 멋진 여성들이 많았다. 성희롱을 당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도 있었고, 파견직을 막기 위해, 비정규직화를 막기 위해, 일터를 지키고 가족과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여성들도 많았다.

그 중 2008년에 기륭전자에서 만난 한 조합원이 한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힘들죠. 어려운 상황이에요. 지금도 용역이 상주하는데 깡패들조차 정규직 대의원한테는 말을 함부로 안하고 비정규직한테는 욕해요. 성질 나죠. 우리가 벌어놓은 돈으로 다니는데. ‘너네들 돈 주면 사람도 죽이겠다?’ 말하면 ‘네!’라고 서슴없이 대답하죠. 너무 버릇없고 싸가지 없고 이제 맞서서 욕하기도 싫더라구요. 가만 혼자 생각하면 참 똑같은 사람한테 욕을 하게 만들고 지 부모나 누이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하나,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하나 생각하면 눈물 나죠.”

욕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이는 용역깡패 또한 자신과 연결된 한 사람으로 보았다. 사람의 품위를 지키는 이들에겐 상상으로 짐작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만난 여성들이 용감하게 세상과 미래를 믿고 싸워나가듯, 삶에 애착을 가지고 싶었다.

나는 독립적으로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 마음에서 의존성을 사라지게 하고 오래된 경쟁적 습관에서 벗어나고 느리더라도 현재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며 나의 길을 충실히 가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적인 활동과 별개로 내 안에 있는 우울함과 의존성과 숨은 분노가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심리적으로 아버지와 이별하는 것도,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동생들과 평등한 관계를 가지는 것도, 세상을 적대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터무니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미래를 믿는 것도 남부끄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삶의 질감이 담긴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다

▲   정은의 빨강그림판  [Matryoshka]     ©일다
여성이 겪는 문제가 결국 우리 삶이 무엇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문제라면,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완전히 환원될 수도, 운동의 이슈로 완전히 환원될 수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먹고 살고, 집을 구하고, 아플 때 치료받고, 자립적으로 아이를 기르고, 서로 고립되지 않고 연대하고, 평등하고 복지를 실현할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가야 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구태의연한 가부장적 문화와 제도 속에서 구체적인 고통을 불필요하게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용케 세상에 나온 한 마디 표어 속에는 수많은 눈물이 숨어 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여성의 목소리가 그 삶의 질감과 함께 기록되는 것을 원한다. 일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낸 시간과 욕망과 기억과 지혜가, 그 오롯한 인생이 한 사람의 목소리로서 기록되고 남았으면 좋겠다. 미래의 여성들의 목소리와 만날 수 있게.

학교에서, 쉼터에서, 농성장에서, 기지촌에서, 외딴방에서 ‘반짝이는 빛’을 꿈꾸며 싸우던 여성들, 녹음기를 들이대는 내게 기꺼이 삶을 들려주고 단지 함께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겨 따뜻하게 악수해주던 손들. 그 자리에 여전히 있다. 육십 년대에 버스차장을 하던 여성들이 지금 비정규직 노동을 하며 대물림 되는 고민과 결심 속에 그 자리에 있다. 취재를 가면 정말 비슷한 얼굴들이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고 듣게 되어 놀랄 때가 있다.

존중 받지 않아도 검질기게 산다. 여성들은 짓밟혀도 여전히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운 엄혹한 시간 속에서도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상상할 능력이 있다. 더 단단하고 더 여문 씨앗 같은 목소리를,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그리고 같이 성장하는 나의 목소리를 함께 천천히 심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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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9/16 [00:36]  최종편집: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나랑 13/09/19 [11:15] 수정 삭제  
  마지막 단락은 적어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싶네요^^ 낭미님을 응원합니다~
꼬깜 13/09/19 [12:58] 수정 삭제  
  꼬깃꼬깃 접어둔 낭미의 이야기들 심지 두려움 힘 이타심.. 이 느껴져요 잘 보고 새기고 갑니다
유나 13/09/20 [21:44] 수정 삭제  
  든든해요 ^^
코리안맘 13/09/20 [21:50] 수정 삭제  
  힘이 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웃는나무 13/09/22 [18:45] 수정 삭제  
  곧은 마음이 담긴 글 곱씹어가며 읽었습니다.
그 마음 지켜서 계속 따뜻함 배어 있는 글 쓰시기를 응원합니다.
한알 13/09/26 [13:34] 수정 삭제  
  짓밟혀도 여전히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겠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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