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릴 잊은 줄 알았는데, 너무 고마워서…’

[기록되지 않은 역사] 달력으로 마음과 마음을 잇다

최상구 | 기사입력 2014/01/29 [06:58]

‘우릴 잊은 줄 알았는데, 너무 고마워서…’

[기록되지 않은 역사] 달력으로 마음과 마음을 잇다

최상구 | 입력 : 2014/01/29 [06:58]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의 역사와 삶,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음력 달력, 귀중한 선물이 되다
 
대한을 앞두고 사할린으로 향했다. 이번 방문은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 이은영 간사와 필자,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지연, 한겨레신문 토요판의 김민경 기자가 동행하였다. 김지연 사진가는 연해주와 모스코바, CIS지역을 다니며 고려인과 일본의 조선학교 사진집을 낸 경력이 있고, 김민경 기자는 <한겨레신문>에 달력 기사를 내면서 인연이 되어 동행 취재까지 가게 되었다.
 
‘여걸 3인방’과 이번 방문 땐 영상까지 찍어보겠다며 캠코더를 질러 버린 필자까지 4인의 방문단이 인천공항을 떠났다. 작년에 사할린을 방문하기 바로 전 대한쯤에 풍설이 몰아쳤던 기억이 있어 약간 불안했지만, 다시 찾은 사할린은 영하 20도 내외의 온순한 날씨로 우리를 맞았다.
 
1월 14일 유즈노 사할린스크에 도착하여 달력을 확인하고 배달할 물량을 챙겼다. 러시아 휴일이 1월 9일까지라 휴일 중 배달에 실패했다는 메시지를 받아 내심 불안했는데, 우체국 EMS로 보낸 720부의 달력은 무사했다. 우리가 가져온 80부를 합해 800부가 사할린 곳곳에 나눠질 것이다.
 

▲ 홈스크시 한인회가 운영하는 한글교실에서 달력을 처음으로 전달 받고 기뻐하는 한인들.    © 최상구

 
첫 배달지는 홈스크시. 이날은 사할린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인 <새고려신문>에서도 동행 취재하였다. 홈스크시 한인회가 운영하는 한글교실에서 달력을 처음으로 전달 받았다. 도착하니 왁자지껄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선물을 받는 그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한인회 부회장님은 달력에서 오타가 적힌 걸 알려주시기도 했다.
 
평일인지라 직장에서 잠깐 짬을 내서 오신 분들은 일찍 돌아가시고, 한 동포가 하는 식당에서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당연히 주제는 음력 달력. 한인회를 통해 받은 음력 달력은 전원 받을 수는 없어서 1세분들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제비뽑기로 가져간다 했다. 그나마 새해 첫 <새고려신문>에 음력 달력이 표기되어 나와 있으나, 배달사고 등으로 이마저 못 받은 분들은 달력을 베끼기까지 한다고 했다. 이날 전해들은, 음력 달력에 관한 사할린 동포의 과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음력이 없던 소련 시절, 마을마다 음력을 볼 줄 아시는 분들이 계셨던 모양이다. 이분들은 해가 바뀌면 음력을 계산하여 직접 공책에 일년 열두 달을 그리고 거기에 음력을 표기했다. ‘핸드메이드’ 음력 달력은 이웃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곤 했단다. 이를 받아본 사람들은 올해의 설과 추석이 언제인지, 소한 대한은 언제인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새고려신문>의 전신인 ‘레닌의 길로’ 시절에, 연초에는 한 장짜리 음력 달력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으로의 길이 열리면서부터는 모국 방문하는 분들이 서울에서 달력을 사 들고 왔다. 몇몇 집에서 본 한복 차림의 한국 달력들이 어떻게 온 것인지 그제사 알게 되었다.
 
사할린에서 정체성을 이어간 ‘음력’ 생활양식
 

▲ 달력 소식을 듣고, 한인회 사무실에 모인 동포들   © 최상구

달력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한국처럼 은행이나 직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이곳에서 음력 달력은 귀중한 선물이 되었다. 한인들은 왜 이토록 음력 달력을 찾았을까? 이번에 달력을 만들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한인들의 고단한 생활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생일과 제사를 지금도 음력으로 챙기고 있었다. 3세로 넘어가면 대부분 양력으로 지내는데, 2세까지는 음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도 음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우리와 유사했다. ‘손없는 날’을 따져 이삿날을 정하고 화장실 등 집안을 수리했다. 결혼 날짜도 이를 참고했다고 한다. 또 바닷가인 만큼 조수 간만의 차인 물때를 알아내어 조개, 새우, 미역 등을 채취하는데에도 음력은 절대적이었다.
 
우글레고르스크에서 만났던 최문자 님은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꼭 알아야 했던 날이 있었다고 한다. 초복과 중복이다. “초복 4일전에 배차(배추)심고, 중복 때 무 심어요. 그러면 그거 가지고 김장하요.” 농사와 일상 생활에서 음력을 활용하는 문화는 2세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본이 패망하여 자기들만 빠져나가는 사이, 사할린에 남은 한인들은 소련의 배급을 받으며 생활을 이어갔다. 자식들은 많은데 배급량은 적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월급도 적게 받았다. 때문에 텃밭을 제공받은 1세들은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텃밭에서 나온 작물로 끼니를 해결하고, 남은 것은 바자르(시장)에 내다 팔았다. 생계를 위해 직장일을 하면서 농사일도 해야 했다. 물때를 놓치지 않고 나가서 조개와 새우도 잡고, 미역도 채취했다.
 
음력 달력은 고향의 상징이자 세대를 잇는 끈
 
일본땅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서 갑자기 소련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한인들. 말도 잘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몸에 베인 생활양식을 지켰다. 글도 잘 모르는 ‘무식자’가 많았던 1세 분들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풍습을 지키려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곳이고, 자신은 고향으로 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전통생활 양식과 풍습을 강하게 고집한 것은 귀향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부모 세대의 모습을 보며 커온 2세들은 1세들이 가지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연스럽게 이어받는다. 음력 달력은 고향의 상징이자, 한인의 정체성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사할린에서 태어나 자란 2세분들도 달력의 사진을 보면서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바로 부모 세대가 가졌던 고향에 대한 동경이자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고향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에 대한 한인들의 욕망은 그래서 처절하다. 작년에 우글레고르스크 지역에 방문했을 때 한인들은 KBS가 케이블티비에 나오지 않는다며 이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이번에 다시 가보니 MBC가 잠깐 나오다 말았다고 한다. 우글레고스르크 한인회 사무실에 모인 여성들은 한결같이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달라며, 우리와 동행한 사할린주 한인노인회 김홍지 회장에게 신신당부했다. “그거 없으면(한국방송 안나오면) 죽은 거나 한가지요!”라고 하셨다.
 
김홍지 회장은 “우리(노인회)가 그런 운동하고 있고, 한국에서 관련 법안이(고려인 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통과되면 가능하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계세요” 라고 말했다. 회장님의 말씀이 귓속에 맴돌았다. “그때까지..., 죽지 말고...”
 
누워있는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많아요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2007년에 처음 사할린에서 워크샵을 하고, 브이코프 탄광을 견학하고 나서 1세분들을 지원하기 위한 계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Daum) 청원을 통해 모금도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사할린 국립대학의 남혜경 박사도 모금에 동참하여, 브이코프 탄광에 살고 계셨던 7명의 한인 1세들에게 쌀과 식용유 등 식료품을 전달한 적이 있다.
 
이번에 브이코프 탄광에 갔을 때 이분들의 소식을 물었지만, 모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내 풀이 꺾였다. “우리가 너무 늦게 찾았나 보다.”
 

▲ 작년 방문 때 뵈었던 이정희 어르신은 이제 고인이 되셨다.  © 최상구

1월 17일 우글레고르스크에 도착한 날. 한인회 사무실에 가니 많은 분들이 모여계셨다. 작년에 왔을 때 저녁을 함께 먹으며 화투도 같이했던 염창월, 김인순 님도 오셨다. 대번에 내 얼굴을 알아보신다. 달력과 함께 작년에 왔을 때 같이 찍었던 사진을 나누어 드렸다.
 
그런데 정작 하룻밤을 신세 졌던 이정희 님이 안 보이신다. 김인순 님께 여쭈었다. 작년 10월에 돌아가셨단다. 근처에 사는 딸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아파트에 가보니 그리 되셨다고 했다. 이정희 어르신과 함께 보았던 옛날 장례식 사진, 졸업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어르신과 이런 얘기를 했었다.
 
“역사 기념관 만들게 되면 이런 사진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료니까 잘 간직하고 계세요.”
“나 죽으면 다 태와 버릴 텐데?”
 
이젠 그 사진 속 인물들처럼, 어르신도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
“죄송해요. 너무 늦어서...”
 
겨울이라 산소에는 가보지 못했다. 다만 따님에게 함께 찍었던 사진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이후로, 내년에 또 오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내년에는 살아계실까? 하는 생각에 ‘또 뵐께요’ 라는 인사는 차마 못했다. 그저 “안녕히 계세요” 라는 인사만 건네며 속으로 기원했다. ‘내년에 또 만날 때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다시 만나 반갑고, 고맙다고 인사할 그날까지!’
 
할머니의 반지 “이거 끼고... 할머니 생각해!”
 
우글레고르스크를 떠나던 날. 민박을 했던 염창월 어르신이 터미널에 배웅을 나왔다. 버스 타고 가면서 먹으라고 초코렛과 사탕을 주셨다. 그리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또 찾으신다. 이내 이은영 간사에게 건네주는 반지 하나.
 
“이걸로 내 일하면서 뺀시(연금) 받았어. 바느질할 때 끼는 거야. 이거 끼고 설라무네 일할 때... 할머니 생각해!”
 

▲  우글레고르스크를 떠나던 날, 염창월 어르신이 이은영 간사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 최상구

 
석별의 정이 아쉬워서 정표라도 주고 싶어 굳이 터미널에 나오신 어르신. 하얀 눈이 보슬보슬 내리던 그날, 그렇게 동포들의 사랑이 쌓이고 있었다.
 
유즈노 사할린스크시로 내려와 사할린에 있는 유일한 한인 노인정을 방문했을 때다. 한 어르신이 "한국에서 달력을 만들어 보내준다고 해서 너무 고마워서 그 기사를 오려놨어요" 하셨다. 자신들을 잊은 줄로만 알았던, 깔보는 줄로 알았던 한국에서 직접 만든 달력을 가지고 온다는 소식에 기쁘고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셨다.
 
이번 방문 내내 한국으로부터 온 소식 하나하나가 이분들에겐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이는 얼마나 이분들이 한국으로부터 소외감을 갖고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해서 마음이 아팠다. 70여년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살았는데,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 없이 세월만 가고 있으니 말이다.
 
모래알이 모여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모래시계처럼
 
사할린에 다녀온 지도 수일이 지났다. 2시간 시차도 시차라고 며칠째 5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글을 쓰기 위해 영상과 사진을 보다 보면 거기에 빠져 들어 한참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얀 성애를 긁어내며 보았던 창 밖의 설경들이 눈에 선하다. 마음은 아직도 사할린에 남은 듯하다. 세 번째 방문이었는데, 후유증이 크다. 어쩌면 이제야 내가 그분들과 교감을 했다고나 할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값진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이 내게 준 울림은 제법 컸다.
 
어찌 보면 우리가 음력 달력을 제작하면서 기대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지 모르겠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분들을 위해 수많은 동포들이 모금을 했고, 이 정성을 받은 사할린 한인들은 고마워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공감을 표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동적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운이 오래도록 남은 이 경험을 선사해준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 드린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시즌1은 이렇게 마감했다. 올해에는 보다 많은 참여를 바탕으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그 두 번째가 탄생할 수 있도록 탄탄한 준비를 해야겠다. 한 알의 모래알들이 떨어져 모이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모래시계처럼, 달력 만들기를 통해 모인 정성과 관심으로 사할린 한인들이 새로운 시간을 시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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