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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③ 북한의 학교 교육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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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 씨가 북한의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칼럼이 연재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인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가 고등중학교에 다닐 때 북한은 9년제 의무교육이었다. 그러다 도, 시, 군, 리에 차례로 중고등학교 5학년제가 늘어나면서 10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2013년부터 유치원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 3년, 중급중 3년으로, 소학교부터 11년 의무교육제 실시 중.) 고등중학교 4년제였던 것이 5년제로 편성되면서, 10년제 의무교육의 첫 졸업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오니 아파트 단지가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마다 초등학교, 중학교가 들어서고, 고등학교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한국 학부모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

 

북한에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시에는 학교가 여럿 있지만 군에는 인민학교 2개, 고등중학교 여학교와 남학교가 있다. 리 단위에는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학교 가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려도 걸어서 통학해야 한다. 한국에는 시골에도 버스가 다니지만 북한은 기름 사정으로 인해 시골에는 교통 자체가 끊긴 지 오래다.

 

인민학교 1,2학년은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보내준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수업이 끝나면 동생들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인민학교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엄하기도 하였지만 편을 안 가르고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대해주셨던 선생님이었다. 아버지 친구분이기도 했는데 지금도 살아계실지….

 

가장 중요한 과목은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

 

▲   북한의 인민학교(현재 소학교) 교과서들

인민학교 교과 과목은 별로 많지 않다. 국어, 산수, 공산주의 도덕,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 음악, 도화공작, 체육 등. 1학년 때 글자 획과 가나다라 받아쓰기부터 시작하며, 산수는 더하기 덜기, 공산주의 도덕은 공중질서 잘 지키기, 웃어른 공경하기, 절약정신 키우기, 서로서로 도와주기, 예절 등을 배운다. 글짓기는 제목을 내주고 글을 지어 발표하기도 한다.

 

제일 중요한 과목이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이다. 인민학교 때는 어린 시절 도록 1판부터 16판까지 외우고 앞에 나가 발표하고 도록 원문을 그대로 쓰게 하는 등 반복 학습을 시킨다. 북한의 교육은 인민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김일성 일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혁명 업적과, 그 업적을 길이 전하기 위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중학교 교과목은 국어, 수학, 삼각, 기하, 물리, 화학, 생물, 영어(로어), 조선지리, 세계지리,  조선역사, 한문, 혁명활동(김일성 동지의 혁명활동 역사), 음악, 공산주의 도덕 등이다.

 

지금은 북한에서도 영어 배우는 것이 붐이라고 하지만, 우리 때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였지 실제 사회에 나와서는 써먹을 일이 없는 과목이었다. 외부에서 들여오는 물건과 상품들도 모두 고유의 우리말로 번역해 팔았고, 외래어를 쓰는 것을 ‘수정주의 랄라리 풍’이라고 해서 단속하였다.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 정신을 먼저 배운다

 

북한은 엄마젖을 떼서 탁아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집단생활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어려서부터 개인주의 정신보다는 집단주의 정신을 먼저 깨우치도록 한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정신을 더 확실하게 교육시킨다.

 

한국에는 그러한 정신이 심각하게 부족한 것 같다. 한마디로 개인주의 정신이 더 투철하다. 나 혼자 잘 살면 그만이고, 개인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을 희생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세상인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일부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이 불법으로 저지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간부들과 힘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비리에 대해 쉬쉬하기 바쁘고 힘없는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도 있는데, 그나마 한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서 그런지 정치권이나 큰 회사의 대표가 저지르는 비리들에 대해서도 폭로하고 죄 값을 치르게도 하는 것을 보면 그나마 법질서가 엄격한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식구들과도, 여러 사람들과도, 또 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나라를 비방하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보위부나 안전부(경찰)에서 심어놓은 감시자들 때문에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지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굳이 조심하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골수에 박힌 교육을 받아온 탓에 자연히 몸에 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아이들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난국으로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고 갑자기 배급도 끊겼다. 기아로 여기저기 병들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느 날 나는 푸념 비슷하게 ‘수령님은 인민들의 이런 사정을 알기나 하나, 차라기 전쟁이나 일어나서 콱 이 나라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가 초등학생이던 아들에게 당한 적이 있다.

 

아들이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런 말 하지 말라, 어떻게 부모가 자식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그러다가 안전부에 끌려 간다’ 라고 하였다. 순간,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냐’ 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북한에서 살 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한국 사람들이 늘 하는 말처럼 어려서부터 받아온 세뇌교육이 무섭다고 느낀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좌절된 오빠의 꿈

 

한국은 학구열이 대단히 높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글을 배우고 영어와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애들이 많다. 한국의 학구열은 부모가 더 심하다. 아이가 원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다른 집 자식보다 못하면 안 된다는 경쟁의식 때문에 한창 철없이 칭얼대고 놀 나이에 엄마가 짜놓은 빡빡한 스케줄에 치여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아이들은 학원에 가기 싫다고 우는데 엄마는 애를 혼내며 강제로 차에 태워 데려다준다.

 

한국 아이들은 태어나서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배우는 것 외에도 여러 개 학원에 다니고, 시험기간에 자율학습까지 하니, 어려서 누려야 할 추억거리도 별로 없이 공부에 치여 사는 것 같다.

 

좋은 점이라면, 배움의 길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공부할 수 있고, 끊임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분야에서 전공을 살리고 싶으면 학원에서도 배울 수 있다. 성별, 년령, 나이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이 이곳의 최고 장점인 것 같다.

 

북한에서는 학교 외에는 학원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배울 수 있는 곳은 학교라는 공간 하나다. 그런데 학창시절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가려고 해도 연줄이 있어야 하고, 부모가 당원이여야 하며, 빽이 좋아야 한다.

 

나의 오빠는 학교에서 전교 1,2등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학교선생님들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학생이었다. 오빠는 장차 학교를 졸업하면 사범대학에 가겠다고 했고, 꼭 고등중학교 선생이 될 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하지만 부모가 당원이 아니고 아주 평범한 가정이라고 해서 오빠의 꿈은 좌절되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것이다. 학교선생님들의 추천으로 대학에 가서 입시시험을 보고 왔을 때, 오빠는 문제가 정말 쉬웠다며 무조건 합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입학통지만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대학신입생 입학식이 끝나 이제 수업이 들어갔을 무렵에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찾아가니, 떨어졌다면서 전문대학에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전문대학에라도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같이 시험을 봤다가 불합격통지를 받았던 오빠친구가 찾아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였다. 오빠의 사범대 시험결과 합격통지가 내려왔으나, 애당초 오빠는 시험만 봤을 뿐 시험지 이름은 위조되어 오빠 대신 학교 교장 딸이 대학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던 것이다. 오빠는 교장 딸을 대학보내기 위한 방패막이였다.

 

그렇게 슬피 우는 오빠의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힘도 없고 빽도 없었기에 어디에 가서 하소연 할 길이 없는 처지였다. 공부를 못했던 교장 딸은 대학 1년 과정을 겨우 다니다 스스로 자퇴를 하였다.

 

오빠는 결혼하여 아이가 셋이 있었지만, 선생님의 꿈은 버리지 못했었다. 아마도 한국에 왔었다면 공부의 꿈을 맘껏 펼쳤으리라.

 

농민보다 학생들이 농사 더 잘 짓는다?! 

 

학생들이 농촌돕기로 옥수수를 심고 있는 모습.  © 그림 - 효주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공부만 하는 것 같아서, 과연 학창시절 추억거리는 뭐가 있을까 싶다. 북한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말고도 과외활동이 많다. 개별적인 활동보다는 집단으로 하는 활동이 주다.

 

인민학교에서는 오전 공부가 끝나면 오후에는 ‘꼬마활동’으로 고철줍기, 고포 고무 비닐 파지 등을 주워 수매소(고물상)에 팔아서 수매증과 돈을 학교에 내면, 학교에서는 그 돈을 모아 학교에 필요한 부품을 사기도 한다. 매 학년마다 계획을 짜서, 폐고물 품목마다 킬로그램을 정해준다. 과제를 받은 것은 무조건 해야 하며, 못하면 할 때까지 반복을 시킨다.

 

영농 시기에 인민학교 3,4학년생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농촌을 돕는다고 해서 조그마한 바가지와 물통을 들고 심어놓은 옥수수 밭에 물을 주러 줄을 맞춰 나간다. 농사철에는 직접 선생님들이 인솔해 밭에 물을 주는 것을 지휘한다. 중학교 1,2학년도 거의 비슷하다. 3학년이 되면 옥수수 심는 철에는 전국민이 동원되는 농촌동원전투에 참가한다.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 대학생과 군인들, 공장기업소 연예인들까지 총동원되어 농사일을 한다.

 

옥수수 심기를 비롯해 모내기철에는 모내기, 김매기철에는 김매기, 가을철에는 가을걷이를 도와준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농촌 일을 하는 시간이 더 길 것이다. 직접 농사일을 하는 농민보다 학생들이 농사는 더 잘 짓는다는 말도 있고, 농민은 그야말로 ‘지도농민’이라고들 한다.

 

군이나 시내에서는 좀 편할지 몰라도 시골학교에선 하는 일이 더 많다. 가을에는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서 학교에 내고, 학급별로 월동준비용으로 산에서 나무를 끌어다가 학교운동장 한 켠에 쌓아놓으며, 종이 생산에 보탬을 주기위해 속세풀을 베어 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학년별로 킬로그램 수를 정해 과제를 주기 때문에 안할 수가 없다.

 

겨울에는 방학숙제도 해야 하지만, 농촌에서 모판을 만들어 비닐을 씌울 때 필요한 활창대나무를 베어 50개~100개를 내야한다. 활창대는 구부러지면 안 되며, 너무 굵어도 안 된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아카시아 나무를 1미터 이상 되는 것만 골라 베어야한다.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공부공부’할 때 북한에서는 학생들에게 ‘과제과제’를 다그친다.

 

학교에서 부수적으로 가져오라는 것도 많았다. 시멘트를 가져와라, 석회가루를 가져와라, 이것저것 많아서 오죽하면 학부모들이 ‘없는 걸 어디서 만들어 오라냐’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혹사시키고 도둑을 만든다고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래도 집에 오면 아이들인지라 재미있는 놀이도 많이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수학여행을 간다면, 북한의 학생들도 견학을 간다. 학년마다 가는 것은 아니고 학교 시절에 한두 번 가는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다 가지는 않고, 공부 잘하고 조직생활을 잘하는 학생을 학년마다 인원 수 맞춰 뽑아간다.

 

호된 군사훈련을 받고 사격을 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무조건 붉은 청년근위대에 가입이 된다. 내가 붉은 청년근위대에 가입될 당시 ‘판문점 도끼사건’(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는 정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고 전군 전민이 준전시 상태에 들어갈 것에 대한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원래는 2학기에 가야하는데 긴급하게 1학기에 군사야영지에 입소하게 되었다. 또 원래 14일간 훈련을 받지만, 일주일간 초스피드로 군인들이 훈련 받는 것과 똑같이 아주 호되게 훈련을 받았다. 군복을 입고 장비와 목총을 갖추고 전술훈련, 산악훈련, 사격훈련 등을 엄격하게 받았다.

 

일주일 되는 마지막 날에는 실제 자동소총을 가지고 사격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나는 사격을 참 잘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성적표에는 군사 점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격점수가 올라갔다.) 다음 해에 우리는 또 군사야영지에서 일주일 훈련받고 마지막날 사격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짜릿하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다.

 

나에게 친구란, 전적으로 믿는 것

 

십대 시절을 떠올리니 친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이 가족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친구일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때 진정으로 속을 터놓고 지낸 친구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학교 때보다는 직장에 취직하면서 만난 동기 두 명이 떠오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구들이 있어서 직장 다니는 생활이 참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나는 스무살에 일찍 결혼을 하였고, 한 명은 양강도로 장기노동을 가고, 다른 한 명도 결혼을 했는데 1년만에 이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한 후론 그 두 친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간히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친구라고 하면, 나는 전적으로 그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에 있으면서 두 친구 빼고는 진정으로 사귄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는 일이 거듭되자, 이 세상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사람을 멀리하게 되고 경계심이 생겼다.

 

한국에 온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는 것 같다. 친하게는 지내지만, 내 마음에는 어디까지 라는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선 가까이에서 항상 멈춰 있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안 되는 것이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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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5/12 [15:09]  최종편집: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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