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바다 한가운데, 독특한 섬 우에쌍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40) 여성들이 운영해온 섬 생활

정인진 | 기사입력 2014/07/28 [00:02]

서쪽바다 한가운데, 독특한 섬 우에쌍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40) 여성들이 운영해온 섬 생활

정인진 | 입력 : 2014/07/28 [00:02]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세상의 끝, 우에쌍 섬

 

▲  우에쌍의 항구. 배들이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정인진

프랑스에서 브르타뉴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피니스테르(Finistere) 지역이 ‘땅의 끝’이라면, 우에쌍(Ouessant) 섬은 아마도 ‘세상의 끝’ 정도가 될 것이다. 우에쌍섬은 피니스테르 지역에서도 배를 타고 대양으로 한참 나가, 가장 서쪽 바다 한가운데 있다.

 

내가 피니스테르 지방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인 브레스트에 간 것도, 순전히 우에쌍 섬에 가기 위해서였다. 브르타뉴 지역의 특색 있는 점들과 비교해봤을 때에도 특히 독특한 우에쌍 섬에 가보지 않고서는 브르타뉴에 대해 뭔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우에쌍을 찾은 건 요즘처럼 이렇게 뜨거운, 지난해 여름이었다. 브레스트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아주 이른 아침 우에쌍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지금까지 방문한 브르타뉴의 몇몇 섬들은 모두 항구 먼 발치에 위치해 있어, 작은 배로 통통거리며 10분~20분 정도 달려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에쌍은 배의 규모부터 달랐다. 브레스트의 골짜기 같은 만을 빠져나가 대양을 향해 한참을 더 달렸다.

 

그렇게 우에쌍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는 많은 관광객과 여름을 보내러 온 휴양객들로 활기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고사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해안 오솔길을 따라 섬의 북서쪽을 향해 걸었다.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 아래로 바닷물이 발아래 멀리서 출렁이고 있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청혼하는 모계사회 풍습

 

우에쌍 근해는 예로부터 파도가 세고 해안이 가파르고 높아,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들어 어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남성들은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멀리 나갔다. 혁명 전 구 시기(Ancien Regime)부터 이곳 남성들은 ‘왕립 선원’(la Marine royale)에 속해, 오랜 항해를 떠나야 했다. 한번 출항하면 2~3년이 걸렸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다.

 

▲  프로엘라(le Proella)는 나무 십자가로 시신을 대신하는 우에쌍 섬의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 Jean Chièze, from Finis Terrae 1960

남자들은 10여세가 되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많은 남성들은 먼 바다에서 죽었고, 시신도 없는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에쌍에는 프로엘라(le Proella)라고 부르는, 작은 나무 가지 십자가가 시신을 대신하는 특별한 장례 문화가 존재했다.

 

우에쌍 섬의 생활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육지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어, 자급자족 경제를 이룩해왔다. 우에쌍 섬은 바람이 무척 세고 공기에 염분의 농도가 높아 농사가 잘 되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저 몇 년 전부터 주민들은 땅을 경작하는 것을 더 망설이지 않고 감자, 당근, 양상추 같은 것을 경작하기 시작해 빠른 속도로 결실을 맺고 있지만, 과거에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섬의 경제는 그저 생존을 위한 자급농사가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은 섬에 남아 땅과 아이들을 지켰다. 우에쌍의 여성들은 진정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은 자연히 모계사회의 풍습을 발전시켰으며, 이것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한 예로, 우에쌍에서는 여자가 결혼하고 싶은 남성을 골라 청혼을 했다. 여성들은 결혼을 해도 자기 본래 성을 유지했고, 수년 뒤 항해에서 돌아온 남편은 아내의 집으로 귀가했다. 결혼 적령기도 매우 특색 있었는데, 여성들의 첫 결혼 평균 나이가 25세, 남성들은 21세로, 내륙의 전통적인 남녀들과 반대였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입은 치마가 활동하기 편리하게 짧은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길이가 종아리 밑으로 더 내려가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마치 내륙의 남성들처럼 목선에 맞춰 짧게 잘랐다. 일할 때는 검은 헝겊모자(bonnet)를 썼다. 우에쌍의 여성들은 힘세고, 강하고,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모두 옛날의 일이다.

 

영화와 사진으로 접한 ‘쥐망 등대’를 드디어!

 

신경을 거슬리며 발목을 척척 스치는 고사리 군락이 끝나자, 보라빛 브뤼이에르(bruyere) 꽃밭이 펼쳐진 해안이 눈앞에 나타났다. 브르타뉴의 해안에는 브뤼이에르 꽃들이 매우 특색 있다. 낮은 키의 송알송알 작은 종처럼 매달린 보라빛 브뤼이에르는 종류도 다양하다. 브뤼이에르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 풍경을 감탄 없이 지나치기란 힘들다. 함께 간 친구는 브뤼이에르가 피어있는 브르타뉴 해안을 보면서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했다.

 

해안에서  쥐망 등대(le Phare de la Jument). 바다 한다운데 작은 바위 위에 세워진 등대다.   © 정인진

 

나는 무엇보다 더이상 고사리들이 발목을 간지럽히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세찬 바람이 다시 걸음을 막고 있었다. 맑은 날씨였는데도 바람이 어찌나 센지, 해안에 바짝 붙어 걸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안 깊숙이 꼬불꼬불 나 있는 둘레길을 따라 ‘쥐망 등대’(le Phare de la Jument)를 바라보면서 겨우겨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에 홀로 떠있는 쥐망 등대는 이미지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보니 더 멋지고 아름다웠다.

 

사진과 영화를 통해 보았던 쥐망 등대를 드디어 직접 보고 있는 것이었다. 쥐망 등대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바위 위에 세워진 등대다. 사진 작가의 작품 속에, 영화 속에 무대로 등장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등대다.

 

우에쌍 섬 둘레 바다는 암초가 많고 거친 파도와 물살로 근처를 지나는 배들이 난파하는 일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1896년 6월에 영국배 ‘드러먼드 캐슬’(Drummond Castle)호가 우에쌍 섬과 몰렌느(Molene) 섬 사이 암초에 부딪쳐 난파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 사고로 258명이나 죽고, 단지 3명만이 살아남았다.

 

쥐망 등대는 1904년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거친 파도와 물살을 뚫고 우에쌍 근해에 삐죽 솟아 있는 7미터 지름의 ‘쥐망 바위’(la roche de la jument) 위에 세워진 47미터 콘크리트 탑이다. 그러나 등대를 만들기 위해 거친 파도와 물살을 뚫고 바위에 접근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날씨도 안 좋아 첫 해에는 겨우 52시간 일했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해 7년에 걸쳐, 결국 계획보다 규모도 작고 7개월이나 늦게 작업이 완료되어, 이 등대에 첫 불을 밝힌 것은 1911년 10월이었다.

 

불을 밝히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등대 관리자들이 교대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탑과 배 사이에 매단 밧줄에 의지해 등대를 드나드는 식의, 매우 위험한 교체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7월,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면서 쥐망 등대는 위험한 교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인 등대가 되었다.

 

나는 쥐망 등대를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걸었다. 그리고 다시 쥐망 등대를 뒤로 하고 섬의 북쪽으로 접어들었다. 이번에는 표면이 흐물흐물 녹아 내린 듯, 바람이 새겨놓은 조각품 같은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바람은 계속 나를 밀고 있었다.

 

난파선의 파편으로 가구를 만들었던 섬사람들

 

바다에서 떠내려온 나무라는 걸 알 수 있는 흔적. 나무 가장자리에 바다의 박테리아들이 갉아먹은 모습이 보인다.    © 정인진

그러고 보니, 정말 아무리 걸어도 숲은커녕 나무군락조차 이 섬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이미 관광 자료를 통해 우에쌍 섬에는 숲이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나무 몇 그루조차 발견하기가 힘들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숲이 없는 우에쌍에서 생활에 필요한 나무는 어떻게 구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에쌍에는 예로부터 ‘나무를 구하려면 모래톱으로 나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특히 ‘풍랑 뒤에는 꼭 바닷가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그것은 난파한 배들의 파편들이 모래사장으로 떠내려 오기 때문이다. 이때 떠내려 오는 것은 나무뿐만 아니었다. 난파선에서 떠내려온 갖가지 물건들이 오랫동안 우에쌍 주민들의 생활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섬사람들은 난파한 배의 파편들을 가지고 침대며 찬장, 식탁, 의자 등 생활에 필요한 가구를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옛날에 만들어진 가구에는 바다에서 떠내려온 나무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또 나무들의 표면 색깔도 덜 예쁘고 서로 색상이 맞지 않아서 파랑이나 하양, 혹은 빨간색으로 색칠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중에서도 하양과 파랑을 유난히 많이 썼는데, 브르타뉴에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 바로 파랑과 하양인 만큼 성모님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그런 것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았다.

 

우에쌍 섬에 있는 니우(Niou) 생태박물관에는 우에쌍 섬의 풍습과 문화사를 알 수 있는 이런 문화재들이 많다. 우에쌍의 전통적인 농가 두 채를 이용해 만든 이 박물관은 프랑스에서 첫 번째로 생긴 생태박물관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20세기 중반까지 이 섬의 일상 생활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생활용품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다시 여름이 되었다. 날이 무더워지니, 딱 하루 그것도 섬의 한 쪽 경사면만 후다닥 돌고 떠나온 우에쌍 섬 여행이 생각났다. 사정없이 등을 미는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끝없이 펼쳐진 시원한 푸른 바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유명하다는 우에쌍의 비바람은 경험하지도 못한 채였다.

 

다시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게 된다면, 그때는 우에쌍 섬에서 얼마간 머물렀으면 좋겠다. 비바람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며칠을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우에쌍의 비바람을 생각했다. 우에쌍은 내게 여전히 가보지 못한 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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