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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 위에서 ‘사람’을 꿈꾸다
[조국과 이국 사이] 前 피스보트 공동대표 조미수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조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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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삶의 역사와 일상의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필자 조경희 님은 한국에서 10년째 생활하는 재일조선인 3세이며,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편집자 주

 

▲  (오른쪽) 씨는 국제NGO 피스보트(Peace Boat) 스텝으로 일해왔다.   

내가 일하는 성공회대학교에는 메인즈(MAINS. Master of Arts in Inter-Asia NGO Studies)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이 있다. 아시아의 시민사회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들을 장학생으로 초청하여 석사과정을 밟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재일동포 3세 조미수(39세) 씨는 작년에 친한 선생님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국제NGO 피스보트(Peace Boat) 스텝으로 12년 동안 배를 타면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그에게 딱 알맞은 기회였다. 피스보트는 평화와 인권, 환경을 테마로 한 크루즈여행을 통해서,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국경을 넘어 시민사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일하는 시민단체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조미수 씨를 처음 봤을 때, 오랜만에 해보는 학생 생활에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와 토론, 외국에서 온 친구들과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한국 생활인데 대학교 안에만 틀어박혀 답답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타고난 활달함과 사교성을 가진 그는 교내에서도, 바깥에서도 자신의 몫을 착실히 해내고 있었다. 이번 여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한 미수씨는 현재 한신대학교 평화와공공성센터 연구원으로, 또한 ARI(Asia Resional Initiative)라는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점심을 먹고 영화를 봤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늦은 시간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새역모의 등장…‘이건 아니잖아’

 

▲  재일동포 3세인 조미수씨는 중학교까지 조선학교에 다녔다.   © 조경희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조선학교에 다녔다. 공부 잘하고 활동적인 모범생으로 통했다. 통지표에는 항상 “성실하고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적혀있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미수씨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언제부터인지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꼈고, 좁은 세상을 벗어나 해외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대학 진로는 자유로운 학풍으로 소문난 니혼대학 예술학부로 정했다. 일본에서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다.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대학 시절엔 공부보다 밴드 활동과 여가 활동에 집중했다고 한다.

 

-하여튼 (대학에 오니) 그동안의 긴장이 많이 풀렸다. 친한 친구들 중에 밴드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정말 개성이 강하고 특성들이 다양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라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이제까지 틀에 박혀 살아온 나에겐 참 신선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내가 재일동포라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겉으로는 놀기만 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990년대 초반의 일본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해외여행도 몇 번 다녀왔다. 지금처럼 아시아 여행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고 유럽에 대한 동경이 컸던 시기이다. 미수씨가 처음 혼자서 여행을 떠난 곳도 덴마크였다. 그런 그가 아시아에 눈을 돌리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의 등장이었다.

 

새역모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기술할 것을 주장하는 일본의 보수단체이다. 미수씨는 어린 나이라 역사에 대해 이렇다 할 지식도 없었지만 “이건 아니다” 하고 직관적으로 분노가 올랐다. 일본 사회가 크게 우경화되기 시작하고 한일간 혹은 동아시아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터진 시기였다.

 

피스보트(Peace Boat)에 “말려들다”

 

1990년대까지 피스보트는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고 활동했다.

그 무렵 미수씨는 졸업 후 취업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잠시 방황하고 있었다. 뭐든지 내키는 대로 해보고자 무작정 찾아간 곳이 피스보트(Peace Boat) 사무실이었다. 교내 포스터를 통해서 접한 피스보트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기본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서 사무실을 찾아 갔는데 바로 꽉 잡혔다. 말려들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단체 규모가 크지만 당시는 아주 작았다. 스텝도 열명 내외로. 그 중 한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어서, 지금 왜 내가 피스보트를 타야 하는지 제대로 설득을 당했다.-

 

피스보트는 1983년에 설립되었다. 일본 문부성이 ‘침략’의 역사를 ‘진출’의 역사로 바꿔, 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 문제로 발전한 제1차 교과서 문제가 직접적인 계기였다. 피스보트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제교류’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과거를 알고 미래를 열자” 라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했다. 역사 문제에 막 눈 뜨기 시작한 미수씨가 피스보트에 합류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고 활동했다. 스텝으로 들어간 후 처음 맡은 일이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전 도쿄도지사의 ‘삼국인’(전후 일본에 남은 구식민지 출신자들을 일컫는 차별 용어) 발언에 항의하는 연대 네트워크를 꾸리는 일이었다. 사회 문제에 아주 민감했던 것도 아닌 내가 그런 큰 일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아서 놀랍고 또 부담스러웠다.-

 

도지사 발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1천명이 모여 도쿄도청을 포위하자고 호소해보아도, 이를 위한 실무와 네트워킹이 허술하다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미수씨는 젊은 사람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재일동포 2세 신숙옥 씨를 비롯하여 존경하는 멋진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피스보트 내부에는 1960년대에 베트남 반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던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같이 평화주의를 이어가고자 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점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피스보트를 세계일주 여행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점점 그런 부분이 어려워졌다. 요즘 활동가들은 ‘베헤이렌’이 뭔지도 잘 모른다. 예컨대 왜 세계를 지향하는 피스보트가 ‘헌법9조’(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일본의 헌법 조항으로 ‘평화헌법’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의 우익들은 계속해서 헌법 9조를 개정하려 해왔고, 그에 따라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왔다)라는 국내 문제를 거론하냐고 문제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국제협력이라는 피스보트의 목적과 일본의 헌법 문제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되는 거다.-

 

2005년 피스보트의 한일 크루즈 “피스 엔 그린 보트”(Peace & Green Boat) 참여자들.   

 

한편으로, 일본 평화운동 진영 안에서는 피스보트의 운동 방식이 아무래도 “가볍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호화로운 배 타고 여행하면서 무슨 운동이냐고…. 그런데 반전 시위나 집회에 한번 하면, 우리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데가 없다. 그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지만, 거꾸로 말하면 모인 사람들이 모두 운동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배를 운영한다는 것에 로망을 느끼는 사람들도 꽤 많다. 지금은 더 그럴 것이다.-

 

반전운동에 본격적으로 발 딛고, 이라크로…

 

일본 내 사회 운동에 집중하면서 미수씨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이라크 전쟁이었다. 9.11이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로 공격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그는 반전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게 되었다. 반전 피스워크를 조직하고 연대체와 실행위원회도 구성했다. 반전시위를 운영하고 전단지를 작성하고,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점점 실무의 범위가 커져갔다. 그러다 2003년 마침내 이라크에 가게 되었다.

 

-이라크 정부가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국제적으로 어필하려고 하던 시기였다. 대사관에서 연락이 와서 결국 피스보트 대표로 가게 되었다. 당시 몇 천명이 모인 곳에서 연설도 했고, 언론에도 많이 다뤄졌다. 보통 일본에서 평화운동의 대표격이라 하면 1960년대 활동했던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갑자기 젊은 여자가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어디든 스피치 하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가서 했다. 미국대사관 앞에서 농성도 벌였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우쭐했었다.-

 

미수씨가 이라크로 떠난 때는, 일본에선 지금 막 전쟁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그 동안 미수씨의 선택에 간섭을 안 하시던 부모님이 이라크에 간다고 했더니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출발하는 전날에 어머니가 사무실까지 오셔서 새벽3시까지 말리다 가셨다. 또 피스보트 관계자 중에 재일동포 선배가 있었는데, 그 언니도 내가 이라크 가는 것을 반대했다. 다른 일본인 스텝들은 일본대사관이 보호해주지만, 국적이 다른 나의 경우는 아니라면서…. 이런 위험성에 대해 피스보트는 책임을 질 수 있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  9.11 이후, 조미수 씨는 반전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게 되었고 2003년에 이라크에 가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활동을 지향하면서도, 국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피스보트 내부에서도 모두가 민감하지는 않았다. 미수씨 자신조차 그랬다. 그는 반전운동의 열기 속에서 “평화를 위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성취감에 빠져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피스보트의 평상 업무에는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갈등을 겪으며 그는 일단 원래 했던 일로 다시 복귀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한일 크루즈’를 시작하였다.

 

외국과 같은 고국, 한국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한일 크루즈 “피스 엔 그린 보트”(Peace & Green Boat) 디렉터를 맡게 되면서, 조미수씨는 ‘고국’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아시아 평화포럼 같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몇 번 한국을 방문했지만, 일을 같이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3백명씩 승원을 확보해 진행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한국의 환경재단을 파트너로 해서 공동으로 진행했다.

 

피스보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규모가 새삼 놀라웠다. 한편으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떠올라 안전 관리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스보트 운영에 있어서 안전 관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일단 배를 타는 전원이 피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출항 자체를 할 수가 없다. 구명조끼를 입고 모이고 보트까지 가는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배가 떠날 수 없다. 이걸 안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피스보트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배 여행의 안전 관리는 해마다 엄격해지고 있다. 이것만은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할 정도다.-

 

“피스 엔 그린 보트” 프로그램은 그 시기의 주요 이슈에 대한 강연회나 토론회를 중심에 두고, 중간에 소모임들이 수시로 돌아갔다. “동아시아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 같은 큰 기획이 있는 한편에, 함께 K팝을 듣거나 일본의 전통놀이를 배우는 등 문화 교류프로그램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일 간의 교류 프로그램보다도 운영 스텝으로 함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다문화 이해를 위한 지름길이었다. 이때 그에게 한국은 외국과 다름없었다.

 

-작은 것들이 쌓여 크게 다투기도 했다. 한국어 수준이 낮아서 의사 소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같이 일하면서 정말… 요만한 작은 일로 싸우게 된다. 예를 들어 김치 종류가 적다는 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처음엔 일본 측은 음식에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일본 배이고 일본 여행회사가 운영을 했으니 아무래도 일본식이 많이 나왔는데, 한국측 불만이 컸다. 정말 분쟁이 터지는 줄 알았다(웃음). 그래서 김치찌개를 메뉴에 반영시키는 등 온갖 수를 썼다. 정말 어려운 것은 역사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웃음). 당시에 우리가 격하게 싸운 것은 독도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이 먼저 식당에 들어갔냐 거나, 매운 음식이 없다거나, 그런 것이었다.-

 

‘국가와 국가’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

 

한일 크루즈를 시작한 2005년은 마침 한일 간에서 독도 영토 문제가 불거진 해다. 그 와중에 운영된 피스보트는, 무엇보다 한국인과 일본인 총 승객 6백명이 참여한다는 스케일이 가장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기자회견도 열었다. 지금은 8백~1천명 가량이 함께 배에 탄다.

 

▲  조미수씨는 국가와 국가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드는 일에, 재일동포로서 역할이 있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 후 한일 관계가 개선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한일 크루즈 운영 스텝으로 일해온 미수씨에게, 이 문제는 큰 과제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피스보트를 통해 물론, 작지만 기쁜 만남들이 많이 있었다. 피스보트를 탄 계기로 상대국가에 유학을 가거나 국제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는 물론, 사회활동으로 연계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승객들이 한 순간이라도 서로 만나서 친하게 지냈다고 만족해서 돌아간다면 그걸로 나도 만족했다. 안 그러면 그렇게 큰 규모의 이벤트를 해마다 진행할 수가 없다. 다만,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근 일본에서 재일조선인과 한국인들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가 잇따르고 있는 점에 대해, 미수씨는 사회적인 후퇴 현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리라곤 당시 생각도 못했다. 극소수의 혐한 현상은 그때도 있었지만, 길거리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줄은 몰랐다.-

 

동아시아 정세가 불안하고 한일 관계에서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 힘든 시기에, 1천명에 가까운 규모의 배 여행을 운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수씨를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4년간 한일 크루즈 운영을 하며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어했던 일에 가깝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걸 10년 지속하면 1만명의 사람들이 국가의 틀을 넘어 ‘함께 여행한 친구’가 된다. 그러면 뭔가 바뀌지 않겠는가! 국가와 국가가 아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면서 지내는 관계를 만드는데 재일동포인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런 생각이 이 일을 계속하는 원동력이었다.-

 

참 인복과 일복이 많은 사람이다. 성실한 태도로 눈앞의 일에 열심히 임하는 그를, 사람들은 내버려두지 않는다. 피스보트를 그만두고, 미수씨는 한국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다만, 예전보다 시간 여유는 좀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늘 긴장 상태이고 불안하다고 한다. 직면한 문제는 여전히 허물어지지 않은 언어 장벽과, 한국인들과의 친밀한 관계 부재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제 막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친구를 앞으로도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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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9/08 [22:08]  최종편집: ⓒ 일다
 
ge 14/09/10 [19:46] 수정 삭제  
  피스보트.. 작은 배인 줄 알았는데 큰 유람선이었군요. 평화기행.. 여행을 하며 배우고, 배 위에서 토론회도 갖고... 피스보트에 한번 타보고 싶었어요. 피스보트를 운영했던 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네요.
다정 14/09/11 [17:44] 수정 삭제  
  작년에 미수님과 피스앤그린보트에서 함께 일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일다에서 소식을 접하니 반갑네요~~ 10월 말 출항하는 피스앤그린보트 참가자도 모집중입니다^_^ www.greenboat.org 놀러오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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